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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쌀·원자재 차관 1조원, 갚을 생각 없는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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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차관계약

재작년부터 상환기일 닥쳤지만

북측, 전통문 안 받고 모르쇠 일관

“북한에 국제사회의 차관 제공 룰을 가르치고, 자본주의를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2000년10월 남북 사이엔 대북 식량·비료 지원 차관계약이 맺어졌습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무상지원이 아니란 데 의미를 실었죠.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첫 정상회담이 열린지 넉 달 만이었습니다. 혹 북한이 떼어먹으면 어떡하느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반드시 상환할거고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해인 2007년까지 거의 매년 40만 톤 가량의 쌀이 북송됐습니다. 대북지원 식량을 군사용으로 전용하거나 시장에 팔아 차익을 챙겼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당국자들은 “상업차관으로 보낸 거라 우리가 뭐라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죠.

지난 2012년 1차분 상환기일이 닥쳤습니다. 식량차관 조건이 10년 거치 20년 상환(연 이율 1%)이었는데요. 통일부는 북측에 전통문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채권추심의 악역을 떠안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몇 차례 더 독촉에 나섰지만 아직 반응이 없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차관으로 준 쌀 240만톤은 40kg 포장으로 6000만 포대입니다. 북한 주민(2400만명) 한 사람당 2포대 반이 돌아갈 정도의 천문학적인 양이죠. 북한 전역이 남한 쌀·비료 포대로 뒤덮였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는데요. 경공업 원자재 8800만 달러 어치와 남북 철도·도로 연결 공사에 쓴 1억4000만 달러 상당의 자재도 모두 차관형식으로 가져갔습니다.

북한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요. 200만~300만명이 아사(餓死)했다는 ‘고난의 행군’ 때와 달리 식량사정이 나아졌다는 게 세계식량계획(WFP)의 평가인데 말이죠. 마식령스키장이나 특권층 선물용 고층아파트 건설에 자금을 쏟아붓는 걸 보면 연간 500만 달러 정도인 차관 상환은 어렵지 않아보입니다.

채무불이행을 북한의 논리로 풀어보면 어렴풋이 답이 보이긴합니다. 아마 북한은 “미 제국주의와의 항전을 위해 남조선에서 군량미를 조달한 것”으로 여기는듯 한데요. 허위·과장 논란이 있지만 북한이 선전하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시기 식량 징발이나 약탈과 마찬가지란 얘기입니다.

지난달 23일 평양에서 열린 빨치산 오백룡 출생 100주 행사에서는 “1940년 사령부의 800여섬 식량마련 명령을 필사적 식랑공작전투로 해결했다”는 찬양이 쏟아졌죠. 북한 국방위가 “북핵은 민족공동의 보검(寶劍)”이라며 핵 보유로 한반도를 지켜주고 있으니 고마워해야한다고 대남선전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북한을 그냥 두고봐야할까요. 아쉽게도 “북한이 반드시 갚을 것”이라 호언하던 우리 고위 당국자들은 자리에 없습니다. 국민혈세를 날린 책임을 물을 길이 없는데요. 대북차관을 내줬던 분들이 나서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아버지가 빌려간 쌀이지만 후계권력자로서 갚아야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촉구해줬으면 좋겠지만 기대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이대로가면 식량차관 7억 2000만 달러와 경공업 원자재, 철도·도로 공사자재 등 모두 9억 4800만 달러(1조 540 억원)의 국민 혈세가 고스란히 떼일 판입니다.

이제라도 정부가 북한의 돈줄을 꼼꼼히 살펴 회수에 나섰으면합니다.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으로 북한 당국이 챙겨가는 연간 8000만 달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월 150달러의 임금 중 실제 북한 근로자에게 주는 건 극히 일부란 점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을 압박할 명분은 충분합니다.

북한 주민을 돕는 대북지원에 힘이 실리려면 평양 당국이 신뢰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혈세 한푼이라도 허투루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야하는건 물론입니다.

이영종 외교안보팀장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이영종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ja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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