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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학교 매점이 사랑방처럼 푸근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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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독산고 학생·학부모·교사들, 협동조합 ‘독산누리’ 출범

학생이사 의견 반영 민주적 운영… 다른 학교보다 값도 싸

유기농 제품 앞자리 진열… 아침 거른 학생에 김밥 대접도

“핫초코 음료 하나 주세요.” “그건 너무 단데 유기농 식혜 먹지 않을래?”

이문을 따지자면 핫초코가 더 남는 장사다. 하지만 몸에 좋은 것을 먹이려고 학생들에게 ‘엉뚱한’ 것을 권하는 엄마들. 서울 금천구 독산고등학교 매점 풍경이다. 아침을 굶고 온 아이들은 찐고구마와 김밥을 대접받기도 하고 사정이 생겨 지각한 얘기, 부모와 싸우고 나와 속상한 얘기가 스스럼없이 오간다. 이곳에서 파는 음료와 과자, 빵, 문구류는 여느 학교 매점들과 다르다. 아이들이 배고플 때 많이 찾는 바나나우유는 1300원에서 1000원으로 가격을 대폭 낮췄다. 제품에 따라 100~300원이 저렴하다. 진열도 당분과 지방이 많이 들어간 것은 뒤쪽에, 우리밀이나 유기농 제품은 손이 닿기 쉬운 앞쪽에 해놓았다.

가장 큰 특징은 매점 운영 주체가 독산고 학생과 학부모, 교사라는 점이다. 이들은 비영리인 ‘독산누리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어 지난 3일부터 매점 운영에 나섰다. 독산누리는 서울지역 고등학교에서 만들어진 ‘1호 협동조합’이다. 재학생이 조합원은 물론 이사로 참여하는 것도 특별하다. 현재 독산누리 조합원은 학생 21명, 학부모 17명, 교원 18명, 지역 주민 3명 등 59명이다. 조합원 출자금은 420만원 정도다. 매일 조합원 수와 출자금이 늘어나고 있다. 학생은 1계좌 5000원, 어른은 10계좌 5만원부터 출자할 수 있다.

경향신문

서울 금천구 독산고등학교 매점은 학생과 학부모, 교원들이 만든 ‘독산누리 사회적 협동조합’이 직접 운영하고 있다. 21일 학생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전보다 분위기가 밝고 제품 가격이 저렴해진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사고 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몸으로 배우는 경제

21일 독산누리 출범식이 열렸다. 매점 운영을 시작하며 물품 주문과 판매 등 모든 것이 서투르다보니 출범식이 늦어졌다. 조합원이 아닌 학생들도 매점 이름 공모나 운영에 아이디어를 내며 참여하고 있다. ‘학수고대’ ‘빵달리자’ 등 재치 있는 후보작 30여편이 접수됐다. ‘카드결제가 가능하게 해달라’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매점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등 다양한 의견도 수렴 중이다.

협동조합 아이디어는 홍태숙 교사(42)와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들의 회의에서 나왔다. 김홍섭 교장(61)이 흔쾌히 받아들여 적극 지원하며 1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대부분의 학교는 매점 운영을 외부에 맡겨 임대료로 연간 2000만~5000만원의 수익을 올린다. 독산고는 2000만원가량의 임대료 수입 대신 협동조합이 매점을 운영하고 수익을 학생 복지에 돌리는 길을 택했다. 김 교장은 “아이들이 협동조합 경험을 통해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면서 “1계좌를 가진 조합원이나 10계좌를 가진 조합원이나 1인 1표로 똑같이 참여해 평등과 협동, 민주주의를 몸으로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매점 분위기가 ‘사랑방’처럼 푸근해졌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인다. 3명의 학부모 조합원이 제품을 팔며 ‘엄마표 잔소리’를 자주 날리지만 좋아하는 눈치다. 매점 벽엔 안도현, 박노해의 시가 나붙었고 건강상식 글, 매점 운영 관련 공지들이 붙어 있다. 협동조합 학생이사를 맡고 있는 김민성군(2학년)은 “우리가 낸 의견이 민주적으로 결정되고 운영되는 것을 보면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사회적 협동조합 증가

독산누리 사회적 협동조합은 매점 운영으로 첫발을 내디뎠지만 공정여행을 바탕으로 한 수학여행이나 사회적 경제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다른 학교에서도 협동조합이 설립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협동조합 연합이 만들어지면 공동유통망 구축 등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지고 공동사업을 기획하기에 좋다. 현재 경기 성남시 복정고와 서울 구로구 영림중 등 10여곳에서 사회적 협동조합이 만들어졌거나 준비 중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올해 10월 기준 모두 198곳이 설립됐다. 올해에만 89곳이 새로 생겨났다. 탈북주민들이나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자리 협동조합, 결식 이웃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좋은 먹거리에 대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시락 협동조합, 지역 학생들에게 방과후 축구교실을 여는 축구 협동조합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의료생협들이 모여 만든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도 1곳 생겨났다.

협동조합 활성화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협동조합을 만들어 매점을 직접 운영하자는 요구가 많지만 최고가를 적어내야 하는 현재 입찰방식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 곳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수의계약이 가능하도록 하는 서울시교육청 조례안이 발의돼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김정명신 서울시 학교협동조합추진단장은 “협동조합의 용역이나 제품이 판로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공부문에서 우선 구매할 수 있도록 관련 법과 조례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 사회적 협동조합

지역사회의 복리 증진, 취약계층 일자리 제공 등 공익을 목적으로 설립된 협동조합.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운영되고 이윤이 나더라도 전액 공익 사업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혜택을 지역사회와 조합원들에게 돌린다. 조합원은 출자 규모에 관계 없이 ‘1인 1표’ 원칙이 적용된다.


<김희연·이재덕 기자 eggh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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