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9 (목)

‘유신 긴급조치 위헌’ 사실상 뒤집은 대법원

댓글 4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당시 영장없는 체포·구금

불법행위 아니다”

수사기관·재판에 면죄부

‘긴급조치 실효 전부터 위헌’

작년 대법 판결과 어긋나


대법원이 유신 시절 ‘초헌법적’ 악법인 긴급조치를 적용한 수사·재판은 그 자체로는 불법행위가 아니어서 손해배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 긴급조치를 위헌·무효라고 선언해놓고도 당시 이를 실행에 옮긴 공무원들의 행위에는 면죄부를 준 셈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최근 유신 반대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서아무개씨와 장아무개씨 및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긴급조치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감금한 것은 불법행위로 손해배상 대상이라는 원고 쪽 주장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에 의해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해 기소한 수사기관이나 유죄를 선고한 법관의 직무행위는 공무원의 고의·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유신헌법은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했고,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당시에) 선언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국가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한 위법행위와 유죄판결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별도로 심리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긴급조치가 당시 실정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것을 집행한 것 자체는 불법행위로 볼 수 없고, 다만 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이 인정돼야 국가에 배상 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판단이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독재 연장을 위해 ‘유언비어 날조·유포’ 행위 등을 처벌한다는 명분 아래 영장 없는 체포·구금 등을 가능하게 한 조처다. 1974년 1호를 시작으로 9호까지 발동된 ‘희대의 악법’으로 불린다. 하지만 대법원이 긴급조치에 따른 수사·재판 행위의 위법성을 처음 판단한 이번 판결로 고문 등 가혹행위를 입증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은 배상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 원고인 서씨 등이 대학생이던 1976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옷이 벗겨진 채 구타당하고 잠을 안 재우는 고문 등을 당한 사실은 인정된다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지난 27일 확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 논리는 2010년과 지난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1·9호가 위헌이라고 판단한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시 대법원은 “긴급조치 1·9호는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긴급조치 1·9호가 해제 내지 실효되기 이전부터 유신헌법에 위반되어 위헌”이라고 밝힌 바 있다. 현행 헌법에 비춰서도 위헌일 뿐 아니라, 긴급조치 발동의 근거로 제시된 유신헌법에 비춰봐도 위헌이라고 한 것이다.

조영선 변호사는 “당시 대법원 판결은 유신헌법에 의한 긴급조치 입법행위 자체가 위헌이라는 취지다. 수사기관의 위법행위를 논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입법 형식의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독일 나치체제의 법도 그 당시에는 정당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법부의 빈곤한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논평을 내어 “과거 유신정권이 긴급조치를 비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며 무고한 시민들을 감옥에 가둔 점을 고려할 때, 대법원 판결 취지는 형식논리에 빠진 독단”이라고 비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공식 SNS [통하니] [트위터] [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 [한겨레21]

한겨레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