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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7단 자물쇠의 비밀이 그의 손끝에서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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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장인을 찾아서] 두석장 중요무형문화재 박문열씨

문화 유산은 면면히 이어온 우리 조상의 예지와 숨결이 스며 있는 민족문화의 정수이며 기반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재난을 견디며 오늘에 이른 우리의 문화유산을 알고 찾고 가꾸는 일은 겨레 사랑의 바탕이다. 그런 문화유산을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며 가꾸는 일은 중요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정부는 무형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하고 있지만, 사회적 관심의 결여로 제대로 보존 활동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평생을 무형문화재 보존을 위해 묵묵히 온몸으로 살아온 이 시대 진정한 ‘장인’의 삶을 살펴보며 새로운 민족문화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어릴때부터 주물공장서 일한 박씨
7단계 거쳐야 열리는 전통자물쇠
실패 반복끝에 마침내 복원 성공
가난 탈출구 연 ‘행운의 열쇠’ 돼
독학으로 평생 갈고닦은 기술
사위와 아들에게 전수하는 중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꿈”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으로부터 탈출한 ‘행운의 열쇠’는 ‘자물쇠’였다. 열쇠가 있어도 열쇠 구멍을 찾을 수 없는 우리 전통의 7단 자물쇠. 일곱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열리는 마술 같은 자물쇠가 바로 박문열(66)을 최고의 장인으로 만들었다.

“자물쇠 주인은 사진도 못 찍게 했고, 스케치도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눈으로 보고 만지작거려야만 했어요.”

어릴 때부터 주물공장에서 일하며 전통 가구의 금속 장식품과 자물쇠를 만들던 박씨는 1992년 겨울, 진주로 향했다. 진주 태정민속박물관의 김창문 관장이 전설로만 알려진 7단 자물쇠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 관장은 쉽게 그 자물쇠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정을 하자 김 관정은 금고에서 자물쇠를 꺼내 보여주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복잡하고도 귀한 자물쇠였다.

그 7단 자물쇠는 장식처럼 보이는 광두정(대갈못)을 살짝 밀어야 열쇠 구멍이 나타났다. 열쇠를 집어넣고 각도와 방향을 여러 차례 바꾸어가며 밀고 돌리고, 이렇게 일곱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열렸다. 박씨는 열쇠를 열고 끼워 보며 개폐 방법을 익혔고, 손가락의 미세한 감각을 총동원해 쇠의 두께를 외웠다. 박물관을 나서자 바로 버스터미널로 가서 종이를 꺼내 자물쇠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서울의 옥탑방 자신의 허름한 공방으로 가서 제작에 들어갔다. 쉽게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중간 4단계가 풀리지 않았다. 기억하기엔 열쇠를 우측으로 돌리고 앞으로 민 다음 다시 오른쪽 아래로 비틀면 5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직접 만들어 보니 아무리 그런 동작을 반복해도 자물쇠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닷새를 꼼짝하지 않고 작업을 하던 박씨는 마침내 문제를 풀었다. 쇳대를 45도로 눕혀서 끼워야 한 것이다. 그렇게 복원한 7단 자물쇠를 1993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한 박씨는 3등에 해당하는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받은 300만원은 그동안 그를 억눌렀던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게 만든 행운의 열쇠가 됐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친구들이 도시락을 먹을 때 수돗가로 가서 수도물로 배를 채울 정도로 가난했다.

1949년 경북 경주에서 3남4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목수일을 하던 아버지는 휴전 이듬해 세상을 떴고, 그의 어머니는 온 가족을 이끌고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아버지는 지독한 가난과 함께 그에게 뛰어난 손재주를 물려줬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과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한 그는 크레파스가 없어 친구들이 버린 것을 주워 그림을 그리곤 했다. “도시락 한번 싸가지 못했어. 배급 나오는 옥수수죽에 만족했지.”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자리를 찾았다. 처음 찾은 일자리는 주물공장. 철을 녹여 재봉틀 부속이나 기계 장치를 주로 만드는 공장이었다.

하루 일당 45원. 어른들 200원의 4분지 1밖에 못 받는 아동 노동력 착취 시대의 희생자였다. 쇳물에 화상을 입어 퉁퉁 물집이 생긴 발로 차비가 없어 걸어 다녀야 했다. 잔업수당을 받으려고 새벽 4시에 잠긴 공장의 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악착같이 일했다. 21살에 독립해서 쇠파이프를 길거리에 주워서 자물쇠를 만들어 팔았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었다. 한남동의 고가구점에 다시 취직해 금속 장식을 붙여 팔았다. 불이 나는 바람에 손님들이 맡긴 가구를 모두 태우고 경찰 조사도 받았다. 35살에 다시 독립했다. ‘끈기’는 그의 장기였다. 젊은 시절 한 스님으로부터 호를 받았다. 그의 호는 심경(心耕). 그의 작업은 그야말로 마음을 가는 마음으로 해야 할 만큼 지루하고 꼼꼼해야 한다. 무쇠 판에 본을 떠서 망치와 작은 징으로 잘라내야 한다. 하루 종일 구부리고 앉아 무쇠 조각과 싸우는 일이다. 그러니 마음을 가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다.

대부분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스승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데에 비해 그는 혼자 독학으로 기술을 갈고닦았다. 2000년 두석장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그는 2년 전 경기도 벽제에 꿈에 그리던 공방을 마련했다. 40살 사위(윤재남)와 36살 아들(박병용)이 그의 옆에서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4년 뒤인 칠순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 전시회를 열고, 자서전 출판하는 것이 남아 있는 꿈”이라고 말하는 그는 검은 테 두꺼운 안경을 끼고 망치와 징을 든다. 고집스러움이 한껏 묻어난다.

벽제/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두석장이란?

목가구의 경첩·자물쇠 등
놋쇠 장식을 만드는 장인


두석장(豆錫匠)은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 만든 황동(놋쇠)으로 목제가구의 장식을 만드는 장인이다. 목가구의 결합 부분을 보강하거나 여닫을 수 있게 하는 경첩,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장석이라고 하는데, 두석장은 그런 장석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이를 칭한다. 두석이라는 이름에 대해 박문열 두석장은 “누런 빛이 콩의 색깔과 같아 붙인 이름 같다”고 설명한다.

장석은 장식물에 그치지 않고 가구의 이음새를 견고하게 하고, 여닫이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또 나무의 흠을 가리기 위해 쓰기도 한다. 주로 황동으로 만들지만 좀더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백동을 쓰기도 한다. 주석이나 백동을 가열해 녹이고, 이것을 망치로 두들겨 0.5㎜ 두께의 판으로 늘이고 그 면을 반듯하게 다듬는다. 여기에 본을 따라 작두와 정으로 오리고 줄로 다듬고, 정으로 문양을 새긴 뒤 사기 분말을 묻힌 천으로 문질러 광택을 내 완성한다.

과거 두석장은 가마나 수레, 허리띠의 장식, 임금이 쏘는 화살촉, 옥새함, 귀중품을 보관하는 궤(상자)의 장식 등을 만들었다. 두석은 누런빛을 띠기에 금을 대신하는 구실을 했다. 가구의 나무 재질이나 빛깔, 문양에 따라 장석의 재료도 달라진다.

자물쇠 가운데 물고기 모양이 많은 것은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자니 재물을 지키는 의미로 물고기 자물쇠를 만든다. 밤눈이 밝은 박쥐 문양은 가구를 지키는 수호의 상징이고, 안방 가구에 주로 쓰이는 나비 문양은 문을 닫을 때마다 춤추는 형상이 돼 사랑과 행복을 상징한다.

박문열 두석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은 박천 숭숭이 반닫이. 비교적 무른 피나무로 만든 가구에 시우쇠(무쇠)를 몇달간 줄과 정으로 문양을 만들었다. 박 두석장이 만든 장석을 붙이면 가구의 값어치는 4배 정도 뛴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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