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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Cover Story] 유니클로에 점령당한 한국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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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요즘 쇼핑몰 성공 조건 중 1순위는 유니클로 같은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 잠깐용어 참조) 점포가 입점했느냐 여부예요. 하지만 SPA 브랜드 콧대가 워낙 높아지다 보니 임대료를 대폭 깎아 달라고 요구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입점시키는 경우도 흔합니다. 웬만한 명품 브랜드보다 SPA 브랜드 지위가 더 세졌다고 보면 돼요.” 국내 쇼핑몰 개발업자 A씨 얘기는 SPA 브랜드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SPA 브랜드가 인기를 끌면서 국내 패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유니클로, 자라, H&M 등 글로벌 SPA 브랜드들은 매년 20% 이상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어느새 한국 패션 시장의 10%가량을 점유했다. 머지않아 국내 패션 시장의 3분의 1이 해외 SPA 브랜드 몫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SPA 브랜드 급성장 이면에는 그늘도 적지 않다. 잘나가던 국내 패션 브랜드들이 줄줄이 폐업하는가 하면 대기업들마저 장사가 안 돼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다. ‘절치부심’한 패션 업체들은 토종 SPA 브랜드를 선보이며 맞불을 놓지만 유니클로 같은 거대 SPA 브랜드를 따라잡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한국 패션은 해외 SPA의 공세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우리나라 패션 산업이 위기를 딛고 도약하기 위한 해법은 없을까.

유니클로 없는 쇼핑몰? NO!

일본 유니클로 어느새 전국 매장 135개로 우후죽순 늘어

스파오·탑텐 등 토종 SPA 브랜드 맹추격하지만 역부족


국내 패션 시장이 극심한 불황이라지만 글로벌 SPA업체엔 딴 세상 얘기다. ‘해외 3대 SPA 브랜드’로 불리는 유니클로, 자라, H&M은 지난해 한 해에만 한국 시장에서 1조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가장 성장세가 두드러진 곳은 일본 유니클로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에프알엘코리아는 지난해 한국에서 6940억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2012년(5049억원)보다 무려 37% 성장했다. 영업이익률도 10%에 육박한다. 한국 진출 첫해인 2006년만 해도 매출이 205억원에 불과했지만 매년 평균 60% 이상 성장해 SPA 브랜드 선두 자리를 굳혔다.

서울과 수도권 웬만한 핵심 상권에서는 유니클로 없는 쇼핑몰을 찾아보기 어렵다. 전국 135개 매장을 보유한 유니클로는 연말까지 매장 수를 150개로 늘린다는 목표다. 여세를 몰아 올해 매출 목표도 1조원으로 높여 잡았다.

유니클로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스페인 자라, 스웨덴 H&M의 성장세도 눈길을 끈다.

자라를 운영하는 자라리테일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2273억원으로 2012년보다 20% 이상 급증했다. 2008년 국내 시장에 진출한 자라는 전국에 40여개 매장을 보유했다. H&M 운영업체 에이치앤엠헤네스앤모리츠는 한국 진출 3년 만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1226억원이다.

이들 3대 SPA 브랜드의 국내 매출을 합하면 1조439억원으로 1조원이 넘는다. 2010년(3441억원)보다 무려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삼성패션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전체 의류 시장에서 SPA 브랜드 비중은 2008년 1.8%에 그쳤지만 지난해 8.5%로 급증했다.

해외 SPA 브랜드들은 도심 주요 상권 쇼핑몰은 물론이고 백화점까지 상륙했다. 서울 신도림 디큐브시티백화점 1층에는 유니클로, 자라, H&M 등 해외 3대 SPA 브랜드 매장이 나란히 들어와 있다. 다른 백화점 1층처럼 명품 매장은 찾아보기 어렵고 SPA 매장이 1층 전체 매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심지어 H&M은 지상 2층과 지하 1층에도 대규모 매장을 보유해 무려 3개 층을 사용한다. 자라는 자매 브랜드 버쉬카, 풀앤베어 매장도 함께 들여왔다. 롯데백화점에서도 유니클로 매장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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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장 성장세에 만족할 법한데도 해외 SPA 브랜드들은 아직 배가 고프다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자매 브랜드’를 함께 들여오는가 하면 온라인 시장에도 진출해 ‘한국 시장점유율 높이기’에 안간힘을 쓴다.

스페인 자라는 모기업 인디텍스사가 보유한 마시모두띠, 버쉬카, 스트라디바리우스, 풀앤베어 매장을 국내에 들여온 데다 공식 온라인 쇼핑몰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까지 오픈했다.

해외 SPA 브랜드가 잘나가는 비결은 뭘까.

간단히 말하면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인식을 깨고 ‘옷값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예를 들어 유니클로 ‘히트텍’은 보온 기능을 갖추면서도 1만~2만원대 저렴한 가격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매년 똑같은 옷을 내놓는 게 아니라 유행에 따라 다양한 의류를 계속 선보이며 개성을 표현하려는 SPA의 방식이 전 세계적인 소비자 트렌드가 된 것도 SPA에는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환경이다.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전시회를 통해 유통되는 패션 브랜드가 주로 인기를 끌었지만 요즘에는 제조부터 생산까지 전 단계를 총괄하는 SPA 브랜드가 트렌드다. 유럽, 미주뿐 아니라 아시아 등 신흥 시장에서 SPA 성장세가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해외 SPA 브랜드가 인기를 끌다 보니 ‘SPA 점포가 입점하면 죽은 상가도 살아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형 백화점이나 쇼핑몰 개발업체들도 저마다 유니클로를 비롯한 SPA 브랜드 유치 경쟁에 열을 올린다. SPA 브랜드는 보통 대형 매장 여러 층을 한꺼번에 임대하기 때문에 임대수익이 안정적이고 소비자 집객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덕분이다.

“서울 도심 핵심 상권 쇼핑몰의 경우 국내 패션 브랜드에는 20~30%대 수수료를 받지만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는 10%대나 심지어 한 자릿수 수수료라는 ‘파격 대우’를 해주고 모셔 올 정도다. 그만큼 SPA 브랜드들이 명품 못지않은 ‘갑’ 행세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익명을 요구한 패션업계 관계자 얘기다.

SPA 브랜드가 잘나가는 뒤편에서 국내 토종 패션 브랜드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간다.

한국패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국내 브랜드 38개가 사라졌다. 쉐인진, 까스텔바작, 데레쿠니 등 캐주얼, 여성복 브랜드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이랜드, 신세계인터내셔날 등 대기업들도 수익이 낮은 브랜드를 하나둘씩 정리하는 실정이다. 제일모직 ‘후부’는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면서 한때 매출이 400억원까지 올라섰지만 SPA 브랜드에 고객을 뺏기자 결국 사업 중단을 결정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아무래도 백화점, 가두점 중심의 유통에 의존하다 보니 옷값에 거품이 많았고 유행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며 현실을 되짚었다.

해외 SPA 브랜드의 맹공격에 충격을 받은 국내 패션 기업들은 저마다 SPA 브랜드를 내놓으며 맞불 전략을 폈다. 처음엔 적수가 안 되는 듯하더니 요즘엔 조금씩 치고 올라오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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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SPA 브랜드가 인기를 끌면서 국내 패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명동의 유니클로 매장.


쇼핑몰 파격 수수료로 ‘SPA 모시기’

지난해 국내 패션브랜드 38개 사라져

글로벌 네트워크 확보하는 게 급선무


이랜드가 2009년 선보인 국내 1호 SPA 브랜드 ‘스파오’는 지난해 40개 매장에서 총 14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유니클로보다 옷값을 평균 10~20% 저렴하게 책정한 전략이 효과를 봤다. 2만9900원짜리 패딩조끼는 지난해에만 30만장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스파오는 올해 매출 2000억원을 목표로 잡았다. 이랜드의 또 다른 SPA 브랜드 ‘미쏘’도 1000억원 브랜드로 성장했다. 스파오는 일본, 미쏘는 중국에 매장을 열어 해외 시장 진출도 꿈꾼다.

신성통상의 SPA 브랜드 ‘탑텐’은 토종 SPA 중 후발 주자지만 성장 속도는 가장 가파르다. 2012년 6월 서울 대학로에 1호점을 연 뒤 2년여 만에 매장이 70여개로 늘었다. 연말까지 10여개 매장을 추가로 연다는 목표. 지난해 매출은 900억원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몇몇 대기업 SPA 브랜드만 성장세를 보일 뿐 국내 SPA 브랜드 모두 잘나간다고 보긴 어렵다. 국내 SPA 브랜드 중 한 곳인 코데즈컴바인은 2012년 80억원, 지난해 169억원 영업손실을 냈다.

전문가들은 국내 패션 산업이 성장하려면 무리하게 매장을 늘리기보다는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해외 SPA 브랜드가 진출하지 않은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선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판매, 유통 등 제조에서 판매까지 일괄 처리하는 역량을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만한 ‘한국형 SPA 브랜드’를 차근차근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글로벌 한상인 이정민 트렌드랩506 대표는 지난해 세계한상대회에서 “한국만의 독자적 인기 브랜드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아무리 디자인을 잘해도 해외 판로가 없으면 무용지물인 만큼 대기업과 협력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한 때”라고 말했다. “국내 패션 브랜드가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해선 제조업의 R&D(연구개발)에 해당하는 소재, 디자인 개발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패션업계 관계자 조언도 설득력을 얻는다.

잠깐용어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

의류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유통,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일괄 처리하는 패션업체를 말한다. 대량생산을 하고 유통 단계를 줄여 의류 가격을 대폭 낮춘 게 특징이다. 유행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1~2주 만에 대량생산하는 장점도 있어 ‘패스트패션(Fast Fashion)’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별취재팀 : 김경민(팀장)·김헌주·강승태·류지민 기자 / 사진 : 류준희 기자 / 그래픽 : 신기철]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78호(10.15~10.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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