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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낮엔 시간제 공무원… 밤엔 갓 만드는 장인… ‘투잡’ 뛰며 전통예술 계승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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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박씨 등 무형문화재 이수자 3명,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등 특별채용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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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직에 임용된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주영 양진환 박형박 씨(위 사진 왼쪽부터)가 다음 달 1일 개원하는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앞에 섰다. 양금을 연주하는 이 씨(아래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공연기획담당 학예연구사로 임용됐다. 문화재청 제공


“청사에서 일을 마치고 직원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인두랑 칼을 꺼냅니다. 그러고는 새벽 3, 4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갓을 짓죠.”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이수자 박형박 씨는 요즘 ‘투잡’을 뛴다. 낮에는 문화재청 산하 국립무형유산원 공무원으로 일하다 밤에는 갓을 만드는 ‘입자장’ 장인으로 변신하는 것. 갓 장인은 제조공정에 따라 대나무로 둥근 테를 만드는 ‘양태장’과 테 위에 얹는 둥근 부분을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 이 둘을 합쳐 최종 완성품을 만드는 ‘입자장’으로 나뉜다. 박 씨는 “1주일에 월∼수요일 사흘만 일하는 시간선택제 공무원에 임용돼 공직과 무형문화재 전수의 두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형유산원은 박 씨와 함께 무형문화재 이수자 2명을 더 채용했다. 이처럼 무형문화재 이수자를 공직에 특별 채용한 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비인기 분야여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무형문화재 이수자를 지원하는 동시에 이들의 현장 지식을 공직에 활용하겠다는 취지로 이들을 뽑았다.

이번에 박 씨와 함께 교육업무를 맡고 있는 임실필봉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이수자 양진환 씨도 시간선택제 공무원이다. 구례향제줄풍류(중요무형문화재 제83-1호) 이수자 이주영 씨는 공연기획 담당 학예연구사로 채용됐다.

박 씨의 경우 갓을 찾는 수요가 워낙 적다 보니 이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빠듯하다. 박 씨는 “일이 험하고 손이 많이 가는데 보수가 박하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공방에 들어가는 걸 입자장이던 아버지가 싫어하셨다”고 털어놨다.

국악 이수자로서 첫 학예연구사가 된 이 씨가 전공한 양금 역시 무형문화재 기악 부문에서 비교적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가야금 거문고처럼 산조(독주곡)를 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이수자가 적기 때문이다. 이 씨는 “국악을 연주한 경험을 살려 국악 콘텐츠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양 씨가 전수받은 임실필봉농악은 근대화로 마을 문화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전국 모든 마을마다 각양각색의 농악이 전해 내려왔지만 현재 보존단체가 조직돼 전통농악을 계승한 곳은 임실과 강릉, 평택, 진주 등 6곳에 불과하다. 임실 농악은 지리산권의 전라 좌도 농악답게 남성적 가락을 중심으로 공동체 놀이의 성격이 한층 짙다. 양 씨 역시 임실 농악에서 상쇠이던 부친에게 직접 장구 치는 법을 배웠다.

양 씨는 “농악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줄어 고사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농악을 하면서 현장에서 느꼈던 답답한 부분을 행정에 접목해 보고 싶다”고 했다.

김홍동 무형유산원장은 “일반 공무원들은 순환보직 때문에 높은 전문성을 쌓기가 쉽지 않다”며 “무형문화재 관계자들이 실상을 잘 아는 이들에게 신뢰를 갖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양 씨에게 최종 꿈을 묻자 ‘끝내주는 농악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요즘 업무가 없는 목∼일요일에 휴일도 없이 연습과 공연에 매진하고 있다. 양 씨는 “공직에서 무형문화재 보존단체를 제대로 돕고 예술인으로선 아버지 뒤를 이어 훌륭한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달 1일 공식 개원하는 국립무형유산원은 132개 종목으로 구성된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을 전담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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