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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수)

타자화 벗고 진화한 조폭영화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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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희화화 아닌, ‘조폭’을 있는 그대로 추적

“괘안타! 우리, 친구 아이가” <친구> (2001년)

“영원한 적이 어딨겠습니꺼. 다 지한테 득 되면 친구고 안되면 원수지” <범죄와의 전쟁> (2012년)

그들은 ‘친구’였다. 무식한 ‘깍두기’였다. 혹은 소멸마저 신화적으로 그려지는 뒷골목의 ‘반영웅’이었다. 하지만 2일 개봉하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속 그들은 그냥 ‘나쁜 놈들’이다. 조직 폭력배, 한국 사회의 주·조연이었던 그들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조폭영화’는 하나의 하위 장르로 자리 잡으며 변화와 진화를 거듭했다.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제공
2001년은 그야말로 ‘조폭영화 전성시대’였다. 800만 신화를 만들어낸 <친구>부터 <신라의 달밤> <달마야 놀자> <조폭마누라> <두사부일체>가 연이어 개봉과 흥행을 이어갔다. <친구>는 <영웅본색>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홍콩 액션물에 뿌리를 둔 형제애와 의리를 내세운 비장한 드라마였고 하층 남성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멜로 드라마였다. 이후 조폭 코미디는 학교로 간 조폭, 절로 간 조폭, 장인이 조폭, 알고 보니 부인이 조폭 등의 버전으로 주인공만 바꾸어 ‘소화불량 수준’까지 쏟아졌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조폭들은 “다음 카페? 거기가 누구 나와바리야?” 같은 유머를 만들어냈다.

야만의 시대에 주먹으로 쓸어 모은 돈다발로 배운 자들 위에서 군림하는 조폭들에게서 어떤 이들은 전복적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저 새끼들보다는 유식해, 깨끗해, 잘 살고 있어” 식으로 그들을 끊임없는 타자화하면서.

<친구>가 조폭 세계 밑바닥을 동지적인 정서로 추억하거나 신화로 만들고, <두사부일체>가 그들을 조롱하며 웃음을 만들었던 것과 달리, <범죄와의 전쟁>은 조폭을 움직이는 윗것들의 행각을 치밀하게 배치하고 이 의리 없는 전쟁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1982년 부산 세관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품을 눈감아 주고 뒷돈을 챙기는 좀도둑 수준의 비리로 연명하던 남자였다. 하지만 우연히 ‘경주 최씨 충렬공파’ 먼 친척인 부산건달 최형배(하정우)와 손잡게 되면서 조폭들의 ‘대부님’으로 불리게 된다. 안기부나 검사 같은 윗선과 조직폭력배들을 연결하는 ‘로비의 신’으로 ‘10억짜리 전화번호부’를 흔들며 허세를 떤다. 건달도 일반인도 아닌 ‘반달’. 친구의 칼에 찔려 비장한 최후를 맞이했던 다른 조폭들과 달리 최익현은 자멸하지 않는 남자다. 아부하고 거짓말하고 야합하고 뒤통수를 쳐서라도 무조건 살아남는 악당 중의 악당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범죄와의 전쟁>이 최익현을 아버지의 자리에 놓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친구나 타자가 아니라 조폭을 가족 속에서 발견할 때, 우리 모두는 ‘공범’이 된다. 조폭이 된 아버지, 그 더러운 밥을 얻어먹고 자란 아들의 원죄의식. 어느덧 한국의 조폭영화는 그 질문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사실 한국의 조폭 영화는 전통적 ‘갱스터 장르’로 완벽히 치환되지 않는다. “군부독재 혹은 그에 상응하는 진정한 갱스터가 사회 상층부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우리나라는 진정한 의미의 갱스터가 활성화될 수 없다”는 윤종빈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2001년부터 터져 나왔던 조폭영화가 지난 10년간 어떻게 빠르게 장르적 생명력을 다했는지는 이후 어떤 정권이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지와 반대로 대입해 이해해도 그리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30대 초반의 윤종빈 감독은 “노무현 정권이 탄생할 때 우리 세대는 확실히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더라. 왜 다시 아버지 세대들의 논리로 역행했는지 이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윤 감독의 문제의식은 22년 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시대로 돌아가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무서운 아이들(Enfant Terrible)’도, 일본 전후세대의 기수 오시마 나기사도 아버지 세대를 저주하고 살해하는 것으로 비로소 다음 시대의 장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아들 세대는 더 이상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분노의 총을 겨누지 않는다. 직업적 ‘조폭’이 아니라 할지라도 행태적 ‘조폭’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세대를 오히려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들의 추악한 행각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악당이 되어버린 아비에 대한 기록. 슬프게도, <범죄와의 전쟁>은 그 전후 세대 아이들의 첫 번째 사부곡(思父曲)이다.

<백은하 기자 una10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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