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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어른과 전혀 다른 아이들 암… "완치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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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주치의] <5> 연세암병원 소아청소년암센터 유철주 센터장

전체 소아 암 생존율 75~80%… 직접 완치 환자 1000명 넘어

학교 복학 등 완치 후 적응 위해 14년째 어린이병원학교 운영

암 투병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어른들과 사회의 배려가 또한 중요

한국일보

세브란스병원 소아암병동에서 열린 어린이 환자 생일잔치에서 유철주 소아청소년암센터장이 아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조영호기자 youcho@hk.co.kr


지난해 여름 청첩장 한 통이 날아왔다. 지인이 자식 시집장가 보낸다는 소식이려니 하고 무심코 봉투를 뜯었는데, 신부 이름이 낯익다.

'요 녀석이 어느새 결혼을?' 유철주(55) 연세암병원 소아청소년암센터장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담겼다. 결혼 당일 식이 끝나고 돌아가려는 유 센터장을 신랑신부는 한사코 붙잡았다. 유 센터장 덕분에 신부가 새 삶을 살게 됐으니 폐백 꼭 받으셔야 한다면서. 절도 받고 대추랑 밤도 넉넉히 던져줬다. '아팠던 기억 훌훌 털고 일어나 건강하게 자랐구나, 대견하다.'

유 센터장이 치료했던 아이들이 이제 많이들 어른이 됐다. 가냘픈 몸으로 생사를 오가던 녀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에서 한몫을 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유 교수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다. 그래서 그는 또 매일 같이 아이들과 함께 암과 싸운다.

의사에서 스승으로

"딸이 어릴 때 백혈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대부분은 감추고 싶어하죠. 그때 치료해준 의사가 아무리 고마워도 사돈 집안에까지 양해를 구하며 초대하기가 어디 쉬웠겠습니까."

유 센터장이 결혼식에 폐백까지 모두 사양하지 않은 이유다. 그 신부뿐 아니다. 오래 전 암 투병으로 맺어진 인연이 유 센터장 주위에서 요즘 부쩍 눈에 띈다. 같은 병원의 소아 심장 의사인 김남균 소아청소년과 교수도 어릴 적 유 센터장에게서 악성림프종 치료를 받았다. 백혈병을 치료해준 한 학생은 5년 전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고 곧 병원에 실습을 나올 예정이다. 치료를 받았던 녀석들이 든든한 후학이 돼 돌아온 것이다. "아이들이 열심히 산 거지 뭐 꼭 제 영향이겠습니까"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유 센터장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묻어난다. 그의 손을 거쳐 완치된 소아 암 환자가 1,000명이 넘는다.

"처음엔 병 이겨내고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원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젠 제 손을 거쳐간 아이들이 기왕이면 사회에 큰 기여를 하길 바라고 있네요. 욕심일까요(웃음)?"

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암 완치 후 생존한 사람이 100만명에 육박하는 시대다. 어른의 암은 상당 부분 생활 습관이나 환경 등 자신의 잘못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소아 암은 아니다. 유전적 요인 때문이거나 아예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자극적인 음식을 많이 먹거나 헬리코박터균의 영향 등으로 생기는 대장암이나 위암이 소아에서는 아주 드물다는 게 좋은 증거다.

나 때문에, 내 아이가?

"자녀가 암이라는 소릴 들으면 대부분의 부모가 죄책감부터 느껴요. 자신이 유전적 요인을 물려줘서 아이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유전자에 내재된 문제가 성장 과정에서 환경을 비롯한 복합적인 영향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지, 암 자체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건 아닙니다. 자책할 필요 없어요."

한 해 동안 새로 생기는 소아(18세 미만) 암 환자는 1,300~1,500명 선이다. 우리나라 전체 암 환자의 약 1%라고 보면 된다. 소아 암의 3분의 1 가량은 백혈병이고 다음은 뇌종양, 악성림프종 순이다. 어른에게도 나타나는 암이지만 소아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혈액 속에 적혈구나 혈소판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아 빈혈이나 출혈, 감염 등이 생기는 백혈병은 성인에게서는 치료가 어려운 급성 골수구성이, 소아에선 완치율이 높은 급성 림프구성이 많다. 신경모세포종, 윌름스종양(콩팥 암)처럼 어린 아이에게만 생기는 암도 있다.

대개 소아 암은 성인 암보다 치료 경과가 좋고 완치 가능성도 높다. 실제로 전체 소아 암의 생존율은 75~80%로 같은 병을 앓는 어른보다 대부분 높다. 소아에서 가장 많은 암인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생존율이 85%, 뇌종양은 70% 안팎이다. 윌름스종양은 90%가 넘는다. 유 센터장은 "빨리 발견해 제때 치료하면 대개 1~3년 만에 회복된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만나는 교장선생님

그럼에도 소아 암 치료는 여전히 쉽지 않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젊었을 땐 완치시키는 데만 주력했어요. 거기까지가 의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완치율이 계속 올라가고 경험이 쌓이면서 아이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투병하는 동안에는 대개 부모 중 한 명이 아이 옆에 붙어서 치료에 전념하고 다른 한 명이 생활비를 댄다. 경제적, 육체적으로 힘든 데다 발병 원인, 잘잘못까지 불필요하게 따지다 보면 집안 갈등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투병 중 부모의 이혼을 겪는 아이가 적지 않은 이유다. 치료에 좋은 영향을 미칠 리 없다.

"초등학교 때 악성림프종이 뇌에 전이되고 얼굴에 마비가 와 치료하느라 1년 동안 학교를 쉰 아이가 있었어요. 머리카락이 덜 자라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채 복학했는데, 그만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됐죠. 하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사회 적응을 어려워하고 있어요."

치료받느라 못한 공부는 언제든 다시 하면 되지만 친구 관계를 맺는 등의 사회적응력은 학창 시절에 기르지 못하면 어른이 돼서도 힘들다. 유 센터장은 그래서 병원 안에 아예 어린이병원학교를 만들었다. 올해가 '개교' 14주년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아이들끼리라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아이가 완치돼 먼저 학교에 보낸 부모를 초청해 투병 중인 아이의 부모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강의도 진행하죠. 여기선 아이들이 저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러요(웃음)."

이런 활동이 소아 암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유 센터장은 바라고 있다.

"암 치료 후 복학한 아이랑 놀지 말라는 부모도 있더군요. 병 옮는다고 말이죠. 말도 안 됩니다. 학교에서마저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가 돼버린 탓에 자기보다 못한 상황의 친구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이 아이들에게서 사라지고 있어요."

그런 얘길 들으면 유 센터장은 아이가 치료를 잘 받았으니 학교에서 세심하게 살펴달라는 편지를 담임 교사에게 보낸다. 아이들의 암 투병이 가족문제와 사회문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어른들의 배려가 항암치료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 유철주 교수는
▲ 1983년 연세대 의대 졸업
▲ 1993년 연세대 의학박사 취득
▲ 1995년~ 연세대 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
▲ 1996~1997년 미국 세인트 주드 어린이 암연구병원 연수
▲ 2005년~ 소아암NGO 한빛 대표이사
▲ 2012~2013년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부회장
▲ 전문 분야: 소아암(백혈병, 림프종, 뇌종양, 신경모세포종, 조혈모세포이식 등)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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