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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이슈 [연재] 중앙일보 '김식의 야구노트'

[김식의 야구노트] 마쓰자카, 투혼의 시대와 함께 저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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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① 은퇴 경기에서 투구하는 마쓰자카 ② 요코하마 고교시절의 앳된 모습 ③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찾은 도쿄돔에서 일본 야구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 ④ 2009년 WBC에서 김태균에게 홈런을 맞는 장면. [교도=연합뉴스, 로이터,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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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16㎞.

일본인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41·세이부)가 온몸을 쥐어짰다.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은 타자 몸쪽으로 힘없이 향했다. 그의 마지막 투구는 그답지 않았다. 타자 바깥쪽을 겨냥해 시속 156㎞ 강속구를 뿜어냈던 괴동(怪童)은 중년의 모습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지난 19일 일본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에서 열린 마쓰자카의 은퇴경기 풍경이었다.

그는 요코하마 고교 시절부터 전국적인 스타였다. 1998년 여름 고시엔 야구대회 준준결승에서 연장 17회까지 250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했다. 이튿날 준결승전에서는 구원승, 다음날 결승전에서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오사카 폭염 속에서 그는 사흘 동안 27이닝을 버텼다. 이 대회 6경기에서 그가 던진 공은 782개였다.

일본인은 5000개 고교 팀이 벌이는 고시엔 열전을 프로야구 못지않게 사랑한다. 흑토 위에서 하얀 유니폼을 입고 온몸을 던진 마쓰자카는 고시엔의 상징이었다. 투혼으로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한, 세기말의 낭만이었다.

1999년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에 입단한 그는 16승 평균자책점 2.60을 기록하며 고졸 투수로는 33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했다. 그해 5월 처음 상대한 당대 최고 타자 이치로 스즈키를 3연속 삼진으로 잡아낸 뒤 마쓰자카는 “자신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포효했다.

마쓰자카의 등장은 일본의 사회현상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그와 경쟁하며 꿈을 키운 선수들을 ‘마쓰자카 세대’로 불렀다. 기성을 뛰어넘고, 세계 최고를 꿈꾼 일본의 에코 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다.

그즈음 마쓰자카는 한국에서도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프로 선수들이 처음 참가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국 야구는 드디어 그와 마주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마쓰자카는 한국과 예선전에서 1회 이승엽에게 투런포를 맞고 무너졌다. 나흘 후 열린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이승엽에게 3연속 삼진을 빼앗았다. 그러다 8회 결승 2루타를 얻어맞고 펑펑 울었다.

마쓰자카는 변화구도 잘 던졌다. 그러나 이승엽을 삼진으로 잡은 결정구도, 일격을 맞은 공도 직구였다. 1999년 54홈런을 터뜨리며 아시아 홈런 신기록(55홈런·1964년 오 사다하루)에 근접한 한국의 홈런타자를 힘으로 누르고 싶어 했다. 당시 이승엽은 “(공이 너무 빨라서) 어떻게 쳤는지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올림픽 이후에도 마쓰자카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괴물이었다. 8년 동안 거둔 승리(108승)나 탈삼진(1355개)보다 72번의 완투(완봉 18번)가 가장 그다운 기록이었다. 2006년 겨울 메이저리그(MLB) 진출을 선언한 그를 잡기 위해 보스턴 레드삭스가 5111만 달러를 베팅해 협상권을 따냈다. 6년 총 연봉은 5200만 달러. 이적료까지 더해 마쓰자카를 데려오는 데 1억 달러(1170억원) 이상을 썼다. MLB 특급 투수를 영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때 마쓰자카는 그렉 매덕스 같은 제구를 가졌으면서 더 빠른 공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험실에서만 존재한다는 자이로볼(총알처럼 진행 방향을 축으로 회전하는 공)이라는 마구도 던진다고 MLB에 소개됐다. 이치로에 이어 미국에 수출하는 일본 최고의 브랜드였다.

마쓰자카는 2007년 15승, 2008년 18승을 거뒀다. 이후 4년간은 부상과 부진에 시달렸다. 공을 너무 많이 던지는 게 그의 문제였다. 완투가 투수의 목표라는 그의 생각은 미국에 가서도 변함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등판일 사이 불펜 피칭도 200개씩 했다. 구단이 말려도 마쓰자카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체격이 다른 만큼, 훈련법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깨는 쓰면 쓸수록 단련된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마쓰자카의 어깨는 다른 투수들처럼 쓰면 쓸수록 마모됐다. 서른 살도 되기 전에 그의 구속이 떨어졌다. 더불어 변화구의 위력도 감소했다. 그래도 마쓰자카는 투구 수 관리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던지고 또 던졌다. 그는 2006년에 이어 2009년에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 대표로 나갔다. 1라운드 한국전에서 1회 김태균에게 직구를 던지다 비거리 140m의 대형 홈런을 맞았지만, 첫 대회에 이어 2009년에도 일본의 우승을 이끌고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젊은 시절 마쓰자카의 인기는 지금 오타니 쇼헤이(27·LA 에인절스) 이상이었다. 일본의 자신감이 최고조일 때 탄생한 스타였기 때문이다. 그의 전성기는 불꽃처럼 화려했으나 짧았다. 2015년 일본으로 돌아와 소프트뱅크, 주니치, 세이부를 떠돌면서 마쓰자카는 한 번도 예전 같은 강속구를 던지지 못했다. 폼도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말년에는 많은 연봉을 받고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자 팬들의 비난도 많이 받았다.

육체적으로 망가지고 정신적으로 지친 그는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 투지로 스스로를 불사른 마쓰자카의 마지막 공은 느리고 삐딱하게 흘렀다. 일본은 물론 한국·미국에서 여러 서사를 남긴 그의 야구 궤적은 이렇게 끝났다. 그는 “안티팬들에게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고시엔에서 많은 선수들이 큰 꿈을 꾼다. 이제 마쓰자카처럼 미련스러울 만큼 우직한 투수는 다시 나오기 어렵다. 까까머리 고교생들도 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성공법을 찾고 있다. 마쓰자카 세대가 투혼의 시대와 함께 퇴장하고 있다.

김식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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