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1 (토)

이슈 [연재] '이현우의 MLB+'

[이현우의 MLB+] 파인타르 규제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티비뉴스=이현우 칼럼니스트] 최근 메이저리그를 둘러싼 가장 뜨거운 화두 가운데 하나는 '부정투구'다.

최근 몇 년간 메이저리그 투수들 사이에서 이물질을 사용한 부정투구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익명의 전직 메이저리거는 최근 미국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인터뷰에서 "올 시즌 메이저리그 투수 가운데 파인타르를 비롯한 이물질을 사용해 부정투구를 하는 투수의 비율이 80~90%에 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미 이물질을 활용해 부정투구를 하는 것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 투수 중에서는 투수 역대 최고 연봉자인 게릿 콜과 지난해 내셔널리그(NL) 사이영상을 수상한 트레버 바우어를 비롯한 에이스급 투수들이 즐비하다. 그런 가운데 사무국이 대대적인 부정투구 단속을 예고하면서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메이저리그에 부정투구가 이 정도로 판치게 됐으며, 그동안 수많은 의혹 제기에도 어떤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던 사무국이 왜 이제서야 칼을 빼 든 것일까?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이물질을 활용한 부정투구의 역사

스포티비뉴스


야구 규칙에 따르면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공에 로진백을 제외한 어떤 이물질도 묻혀서 던지면 안 된다. 하지만 모든 투수가 이물질을 사용하지 않은 적은 야구가 시작된 이래로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메이저리그 초창기 사용되는 공은 지금과는 그 형태가 매우 달랐다. 야구가 시작된 1800년대 중반 야구공의 무게는 겨우 85g에 불과했다.

녹인 고무를 가운데 넣고 털실을 감아 만들었기 때문에 탄성이 매우 좋아서 경기당 100점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1850년대부터 한동안은 무게가 155~169g에 지름이 7~8.9cm에 달하는 거대한 공이 사용됐다. <야구의 역사>를 쓴 조지 벡시에 따르면, 야구공이 현재와 같은 무게(141.7~148.8g)와 둘레(22.9~23.5cm)가 된 것은 1872년이다.

하지만 여전히 야구공에 대한 통일된 규정은 없었고 타격이 좋은 팀은 반발력이 좋은 공을 사용하거나, 투수력이 좋은 팀은 반발력이 약한 공을 사용하는 등 홈팀 사정에 따라 제멋대로 섞어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 야구공은 표피가 상해도 교체되지 않았고, 이를 활용해 일부러 공에 흠집을 내서 불규칙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술'로 여겨졌다.

이런 부정투구를 가리켜 스커프볼(Scuff ball)이라고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침이나 바셀린 등과 같이 마찰력을 감소시키는 이물질을 묻혀서 의도적으로 회전수를 줄이는 형태의 부정투구도 있었다. 이를 능숙하게 활용하면 너클볼(Knuckle ball)처럼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불규칙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이른바 스핏볼(Spit ball)이다.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타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부정투구를 치기 어렵다. 이를 허용하면 투수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고 스커프볼은 야구공이 한 번만 상해도 바꾸는 규칙이 도입된 1915년, 스핏볼은 1920년에 금지됐다. 여기에 더해 1920년부터 단단한 코르크심이 들어가서 반발력이 높아진 공인구가 등장하면서'라이브볼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스핏볼이 '멸종'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게일로드 페리(통산 314승)는 널리 알려진 스핏볼의 달인이었으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스핏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중계 기술이 발전한 90년대부터였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도 스핏볼과는 비슷하면서 다른 형태의 부정투구는 선수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었다.

바로 선크림(자외선 차단제)과 파인타르를 비롯한 여러 물질들을 통해 마찰력을 높이는 방식의 부정투구다.

메이저리그 공인구의 특수성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사용되는 공인구는 여타 리그에서 사용되는 공에 비해 표면이 미끄럽기로 악명이 높다. 이로 인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메이저리그는 1938년경부터 일명 '러빙 머드(Rubbing Mud)'라고 불리는 진흙을 공인구에 바르고 있다. 실제로 MLB 공식 규칙 3.01(c)에도 "심판은 야구공이 규격에 맞는지 확인한 후 광택이 제거되도록 진흙을 펴발라야한다"고 적혀있다.

메이저리그 공인구가 누렇게 보이는 이유다. 하지만 진흙을 발라도 여전히 KBO리그와 일본프로야구(NPB)에서 쓰이는 것보다 메이저리그의 공인구가 미끄러운 것은 여전하며, 혹시라도 관리 소홀로 진흙이 마르기라도 하면 오히려 바르지 않은 것보다 더 미끄러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손가락의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고안해왔다.

2014년까지 투수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던 방식은 일명 '황소개구리(Bullfrog)'라 불리는 선크림과 로진, 땀을 즉석해서 배합해 묻힌 다음에 던지는 것이다. 빅리그에 콜업된 신인 투수들은 선배들로부터 선크림 사용법을 배웠고, MLB 공인구를 쓰는 국제대회에 나갈 때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역시 한국인 메이저리거들로부터 이런 비법(?)을 전수받았다

황소개구리 선크림 외에도 분사형 스프레이 선크림, 무설탕껌 등이 활용됐고, 은퇴한 투수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정도 수준의 이물질은 타자들도 "다들 알면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014년까지만 해도 '파인타르(pine-tar, 소나무과 식물의 뿌리 또는 줄기를 건류해서 만든 흑갈색을 띄는 점성이 강한 물질)'를 비롯한 점성이 더 강한 물질 같은 경우엔 얘기가 달랐다.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선수들만의 암묵적인 룰'을 이해하기 위해선 2014년에 있었던 한 사건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014년 4월 24일 당시 뉴욕 양키스 소속이었던 마이클 피네다는 목에 파인타르를 묻히고 경기에 나섰다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 존 패럴의 항의로 퇴장당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보스턴 패럴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추운 날씨에 그립감을 좋게 하려고 하는 것은 존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확연하게 보이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바꿔 말하면 너무 티가 나기 때문에 지적했을 뿐 추운 날씨에는 파인타르를 몰래 사용해도 '존중'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스턴 투수 클레이 벅홀츠 역시 "오늘처럼 기온이 낮은 날에는 로진백만으론 공을 다루기 어려울 수 있다. 그가 파인타르를 사용했다면 '타자의 몸에 맞히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라면서 상대팀 선발 투수인 피네다를 두둔했고, 보스턴 타자인 데이빗 오티즈와 더스틴 페드로이아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쨋거나' 피네다는 파인타르가 적발되어 퇴장 당했고, 이는 이물질 적발에 따른 마지막 공식 퇴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에는 단 한번도 이물질 사용으로 공식 제재를 받은 투수가 없다.

그렇다면 대체 그 사이 메이저리그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5년 공인구 조작(Juiced Ball)이 만들어낸 환경 변화

스포티비뉴스


고작 10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지만, 2014년부터 2017년까지 4년 사이에 메이저리그의 홈런수는 4186개에서 6105개로 늘어났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 의문을 품은 야구 분석가 롭 아서는 조사에 착수했고 2018년 ESPN을 통해 "최근 사용되는 공인구의 코어는 2015년 올스타 이전에 사용된 공인구의 코어보다 약 0.5g 정도 가벼우며, 덜 조밀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한편, 외적으로는 공인구의 둘레가 작아지고 실밥 높이가 낮아지면서 공기저항이 감소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에 대해 야구 물리학자 앨런 네이선은 이러한 공인구 변화가 "같은 타구속도와 발사각도일 경우 2015년 올스타 이전 공인구에 비해 평균 8피트(2.44m) 더 날아가게 만들었으며 이 경우 공인구 변화로 리그 홈런수가 약 25% 가량 증가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일명 '공인구 조작(Juiced Ball)'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더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반발력 및 공기저항의 변화지만, 부정투구가 늘어난 것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공인구의 둘레가 작아지고 실밥 높이가 낮아졌다'는 점이다. 공인구의 둘레와 실밥 높이는 투구하는 데 있어 마찰력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얼마전 ESPN은 최근 메이저리그의 공인구가 얼마나 미끄러워졌는지 잘 알려주는 인터뷰를 싣었다. ESPN에 따르면 익명의 은퇴한 포수는 최근 공인구를 "당구공에 베이비파우더를 묻힌 걸 생각하면 대충 비슷한 느낌이다"라고 전했다. 투수와 포수만큼은 아니지만 수비 중 송구를 하는 타자들 역시 이런 변화를 모를리가 없었다.

관련 기사: [이현우의 MLB+] 끝나지 않은 MLB 공인구 조작설

즉, 가뜩이나 메이저리그 특유의 미끄러운 공인구를 사용했던 투수들이 2015시즌 올스타전 이후로 더 미끄러운 공을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부 투수들이 택한 방식은 이전부터 기온이 낮은 날에 그립감을 좋게 하기 위해서 몰래 쓰던 '파인타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타자들은 '용인'했다는 것이다.

스포티비뉴스


스포티비뉴스


이런 분위기를 알려주는 사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2019년 5월 9일에 있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좌완 기쿠치 유세이는 7.2이닝 3피안타 1실점 3탈삼진 호투로 팀의 10-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날 기쿠치의 모자챙 안쪽에는 파인타르로 추정되는 흑갈색 물질이 묻어 있었고, 그가 공을 던지기 전에 왼손으로 모자챙 안쪽을 문지르는 장면이 자주 중계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매체 NBC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외야수 카메론 메이빈, 포수 오스틴 로마인을 비롯한 상대 양키스 타자들은 기쿠치가 파인타르를 묻혀서 던진 것에 대해 "파인타르가 기쿠치의 호투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양키스 코치진 역시 파인타르를 묻혀 던지는 행위에 대해 어떤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타자들이 투수들의 파인타르를 비롯한 이물질을 활용한 부정투구를 알면서도 용인해왔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타자의 경우 타격 시 미끄러지지 않게 배트에 파인타르를 바르는 행위 뿐만 아니라 송구를 원활히 하기 위한 파인타르 사용은 규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비 과정에서 송구를 해야하는 타자(야수)들은 공인구가 미끄러워졌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파인타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의 파인타르 사용에도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 자신이 속한 팀의 투수 가운데 일부가 파인타르를 비롯한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 팀 투수에 대한 파인타르 사용 지적은 자신의 팀 투수에 대한 파인타르 사용 지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편, 자신들이 공인구 변경으로 인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투수들의 부정투구에 대해 관대해진 원인이었을 거란 추정도 가능하다.

그런데 왜 올 시즌 갑자기 투수들의 부정투구에 대한 타자들의 반응이 달라진 것일까?

또 한번의 공인구 변경과 극단적인 투고타저 현상


이 문제에 있어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타격 성적'이다.

2021시즌 메이저리그는 리그 전체 타율 0.237로 1969년 마운드의 높이가 10인치로 낮아진 후 최저 수치를 기록 중이다. 타석당 삼진 비율 역시 24.1%로 역대 1위에 올라있다. 이러한 투고타저 현상은 타자들의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5월 20일까지 무려 6번의 노히터가 나온 것은 그런 위기의식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투고타저 현상이 발생한 이유 역시 크게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첫째, 올 시즌을 앞두고 변경된 공인구의 공기 저항 계수가 높아지면서 이전만큼 타구 비거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리그 전체적으로 이전 시즌 대비 타석당 홈런 비율을 포함한 타격 성적이 폭락했고, 투수들의 부정행위를 용인할만한 여유가 사라졌다.

둘째, 투수들이 사용하는 이물질이 이전까지 (암묵적인 허락을 받아) 사용했던 '불프로그 선크림', '파인타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효능을 지녔다는 것이다.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최근 투수들이 즐겨 사용하는 제품 중 하나인 '스파이더 택'은 스트롱맨 선수들이 아틀라스 스톤이라는 시멘트 공을 들때 그립감을 높이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노 새리스 기자가 전직 메이저리그 투수와 실험을 한 결과, 과거부터 널리 쓰이던 불프로그 선크림과 로진백 혼합물을 사용했을 때보다 분당 회전수(rpm)가 약 500회 가까이 증가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패스트볼의 회전수는 구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베이스볼서번트>에 따르면 지난해 분당 회전수가 2000rpm 미만인 패스트볼의 피안타율은 0.309(헛스윙율 13.1%)였다. 반면, 2300rpm 이상이 되면 피안타율은 0.253(헛스윙율 21.6%)까지 감소하고, 2600rpm 이상이면 0.213(헛스윙율 27.5%)까지 떨어진다.

포심 패스트볼의 회전수에 따른 성적 변화

2600rpm 이상: [피안타율] .213 [헛스윙율] 27.5%
2300rpm 이상: [피안타율] .253 [헛스윙율] 21.6%
2300rpm 미만: [피안타율] .280 [헛스윙율] 17.1%
2000rpm 미만: [피안타율] .309 [헛스윙율] 13.1%
* MLB 평균 포심 패스트볼 rpm: 2264회

만약 '이전에 사용했던 방식'보다 500rpm 이상 회전수를 높일 수 있는 이물질을 쓰고 있다면 이는 과거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금지약물 못지않은 부정행위(cheating)로 볼 여지도 있다. 즉, 투수들의 부정행위가 타자들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그동안 암묵적으로 넘어갔던 불프러그 선크림, 파인타르에 의한 효과)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시즌 메이저리그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고타저 현상에 가장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정작 타자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무국은 왜 이제야 칼을 빼어든 것일까?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지난 몇 년간 MLB 팬들과 매체들의 지적이 빗발쳤음에도 이물질을 사용한 부정투구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야구의 흥행을 위해 지난 수년간 사무국이 추진했던 정책적 기조는 '인플레이 증가'와 '스피드 업'이다. 2015 올스타 이후 공인구를 바꾼 것도 그런 사업 중 일환이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공인구가 미끄럽다는 투수들의 항의에는 "KBO리그와 NPB처럼 덜 미끄러운 공인구를 2019 스프링캠프 초기에 사용했는데 타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며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다.

이런 변명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2015년 공인구 변경은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이루어졌다. 올시즌 공인구의 변경 역시 별다른 잡음 없이 스리슬쩍 행해졌다. 만약 사무국이 정말로 공을 덜 미끄럽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더라면 스프링캠프 초기 며칠간 써본 후 현장 반응을 이유로 도입을 하지 않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관련 기사:
[이현우의 MLB+] 메이저리그는 지금 제2의 스핏볼 시대 (2018년)
[이현우의 MLB+] 왜 MLB는 부정투구를 방치할까? (2019년)

즉, 사무국은 지난 수년간 벌어진 여러 가지 논의에도 미끄럽지 않은 공인구로 변경할 의지가 없었고, 마찬가지로 투수들의 부정투구를 제재하는 데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랬던 사무국이 갑자기 규제를 하겠다고 나선 원인은 누가 보더라도 '투고타저 현상' 때문임이 명백하다.

스포티비뉴스


이 지점이 아쉬운 이유는 그동안 부정투구에 대해 암묵적으로 용인하던 사무국이 적극적인 단속에 나서게 된 동기가 '공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닌 '투고타저 현상과 그로 인한 흥행 저하'를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메이저리그 팬들은 응원하는 투수의 이물질을 활용한 부정투구가 수면위로 드러날 때마다 충격과 실망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더 이상 쉬쉬할 필요 없이 파인타르 또는 다른 물질을 '로진백' 또는 '러빙 머드'처럼 투구시 사용 가능한 물품으로 지정하고 타자가 파인타르를 배트에 바를 때와 마찬가지로 사용량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마련하거나, 마찰력을 높이는 이물질을 쓸 필요가 없도록 공을 덜 미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등 다양한 방법들이 논의되어 왔다.

팬들과 매체가 내놓은 이런 개선책에 대해선 '선수들의 반대', '롤링스 社와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난점에 대해 역설하다가 정작 2021시즌이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이 되자 대대적인 검사와 근절이라는 더 어려운 방식으로 칼을 빼어든 MLB 사무국을 보면, 과연 이번 사무국의 '이물질 단속'이 진정 공정한 경쟁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부정투구는 분명한 규칙위반 그러나...

스포티비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물질을 사용한 부정투구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다. 이제라도 철저히 규제하는 것이 다행이고,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는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하고, 소수라도 규정을 지켰다는 이유로 손해를 본 투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동안 사무국과 현장에서 묵인했다는 이유로 이물질을 사용해 부정투구를 저지른 투수들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일이 이 정도로 커질 대로 방치한 사무국에도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무국은 흥행을 위한다는 명목에서 2015시즌 중반 공인구를 미끄럽고 공기저항이 적은 공으로 '몰래' 변경했고 이로 인해 타자들은 이익을 본 반면, 투수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선 이물질을 사용한 부정투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출된 투수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무국의 칼끝이 처음 향한 곳이 2018년 투수 중 최초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얘기를 꺼낸 바우어라는 점도 흥미롭다. 바우어는 2018년 개인 SNS를 통해 "규정은 규정대로 시행되어야 한다. 파인타르 등 이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훈련을 통해 회전수를 높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며 "공정한 경쟁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한 경기에선 1회에만 이물질을 사용해 회전수를 분당 300회가량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부정투구를 한 투수들에 대한 사무국의 제재는 없었고 2년 뒤인 2020시즌 바우어는 패스트볼 회전수를 2018시즌 대비 분당 454회나 늘리면서 내셔널리그(NL) 사이영상을 차지한 후 올 시즌을 앞두고 LA 다저스와 3년간 1억 200만 달러(약 1138억 원)에 계약을 맺었다.

스포티비뉴스


학교로 치자면 시험볼 때 다들 커닝을 하고 있다고 교사에게 말한 학생이,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자 본인도 커닝을 해서 전교 1등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듬해 학교 측에서 커닝을 철저하게 단속한다면서 2년 전 커닝에 대해 항의했던 학생을 집중적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커닝을 눈감아준 이유는 학교 측에서 볼 때도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잘못이란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커닝을 한 학생도 잘못했지만, 더 큰 잘못을 한 쪽은 대놓고 커닝이 이루어져도 방치했던 학교 측이 아닐까. 한편, 너도나도 커닝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심에 따라 커닝을 하지 않는 학생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80-90%에 이르는 학생들이 커닝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얼마전 다르빗슈가 SNS에 남긴 글은 주목해 볼만 하다. 파인타르 사용을 의심받고 있는 다르빗슈는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물질을 쓰지 않았다. 왜 메이저리그만 그럴까? 반발력 좋은 공으로 바뀐 뒤 투수들이 SOS를 외치고 자리를 잃을 때 왜 사무국은 방관했나. 왜 미끄러운 공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돈 때문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투수들이 공이 미끄럽다 해도 이물질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타자들도 배트 미끄럽다고 파인타르를 바르지 말고 맨손으로 치는 게 공평하다"고 덧붙였다. 이물질을 사용해 부정투구로 이익을 편취한 이가 하는 변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이 문제에 관련해 그동안 쌓여온 모순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스포티비뉴스=이현우 칼럼니스트
제보>hwl0501@spotvnews.co.kr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