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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연재] 중앙일보 '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박인비 경기날, 할아버지는 8㎞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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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 걸으면 8언더파 친다”

병환 중에도 손녀 우승 위해 걸어

조부상 열흘만에 US오픈 출전

할아버지 영전에 우승 선물 다짐

중앙일보

2016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박인비가 귀국길에 할아버지를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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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8㎞를 걸으면 손주가 8언더파를 치고, 4㎞를 걸으면 4언더파를 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박인비 경기 날이면 경기 분당의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8㎞를 꼭 걸어서 오갔다. 위암 투병 중에도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모으며 손주의 선전을 빌었다.

박인비의 할아버지 박병준 옹은 지난달 25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인비는 4일(한국시각) 개막한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을 앞두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경기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옹은 193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다 학업을 접고 생계를 위해 산에서 나무를 했다. 머리가 좋았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뭐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전 한국 우유병에는 뚜껑이 없었다. 비닐을 씌운 뒤 고무줄로 칭칭 감아 막았다. 위생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잘 샜다. 박 옹은 1969년 병마개를 발명했다.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6.25 전쟁 참전 훈장을 유난히 아꼈다.

박인비 부친 박건규 씨는 “아버님은 손주 8명 중 인비를 유달리 아꼈다”고 말했다. 박인비와 함께 살기도 했고, 골프를 통해 깊이 연결됐다. 박 옹은 생전 3대가 함께 골프를 하는 게 소원이었다. 박인비가 가장 먼저 골프를 배웠다. 대회에 나갈 때면 부모보다 할아버지가 더 많이 따라 다녔다.

박인비의 빼어난 퍼트 실력은 할아버지 덕분이라고 가족들은 얘기한다. 퍼트를 잘 못 했던 박인비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후 퍼팅에 눈을 떴다. 일찌감치 미국 유학을 떠난 것도 할아버지 격려와 후원이 있어서다.

박인비의 첫 우승은 2008년 US여자오픈이다. 할아버지 도움이 컸다. 그전 몇몇 대회에서 마지막에 무너졌는데, 박 옹이 “네가 LPGA에서 우승하는 걸 보는 게 소원이다. 우승하면 나도 똑같은 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할아버지의 강력한 후원 속에 박인비는 최고 권위인 US오픈 정상에 섰다.

2016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박인비는 손가락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 무렵 박 옹도 계단에서 발을 잘 못 디뎌 다쳤다. 손주가 대회에 안 나가니 걸을 일이 없었고 다리에 힘이 빠진 탓이었다.

박 옹은 머뭇거리던 손주의 올림픽 출전을 독려했다. 올림픽 전초전 격이던 제주 대회 당시 불편한 몸으로 이틀간 36홀을 돌며 응원했다. 박인비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자신을 위해 구불구불한 산길을 걷던 할아버지 모습에서 느꼈던 감동도 한몫했다.

박 옹은 2017년 싱가포르 HSBC챔피언스에 따라가 손주 우승을 지켜봤다. 그 일주일 뒤 뇌경색으로 쓰러져 4년 2개월을 투병했다. 눈도 뜨지 못하면서도 손주의 우승 소식에는 오른손을 흔들었다고 박건규 씨가 전했다. 박인비는 2주 전 임종 면회를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번 대회는 박인비에게 할아버지 별세 후 첫 메이저 대회, 첫 US오픈이다. US오픈도, 올림픽도, 박인비에게는 할아버지와 연결되는 특별한 대회다. 이번 대회는 샌프란시스코 올림픽 클럽에서 열린다. 올림픽에서 열리는 US오픈, 더 욕심을 낼 만하다. 조직위는 박인비를 리디아 고, 펑샨샨과 한 조로 묶었다. 2016년 올림픽 금, 은, 동메달리스트다.

코스는 매우 어렵다. 페어웨이가 좁고, 나무가 많으며 러프는 길다. 박건규 씨는 “지난 몇 년간 US오픈이 장타자를 위한 코스 세팅이었는데, 올해는 정교한 선수에게 유리하다. 인비를 끔찍이 아꼈던 아버님이 도와주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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