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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연재] 중앙일보 '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데이터 골프, 공은 이미 호수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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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디섐보 ‘골프계 잡스’ 연상

파5 홀서 1온 도전 성공, 우승도

기본 개념 바꾼 도전은 어디까지

중앙일보

브라이언 디섐보가 우승을 확정한 후 기뻐하고 있다. 디섐보는 “오늘 아침 교통사고로 병원에 누워 있는 타이거 우즈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고 힘을 냈다”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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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슨 디섐보(28·미국)를 보면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연상된다. 아이팟과 아이폰을 만든 잡스처럼 디섐보는 혁신을 꿈꾼다. 거리를 늘리려고 근육을 헐크처럼 20㎏ 정도 불렸다. 장비도, 스윙도, 경기 전략도 기존 상식을 의심하고 원점에서 다시 분석한다. ‘감(感)’에 의존하던 스포츠 골프를, 숫자와 데이터를 통해 해석하려고 한다.

둘 다 독특하다. 젊은 시절 동양철학에 심취해 인도를 여행했던 잡스처럼, 디섐보는 기존 프로골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골프를 즐기거나 우승컵을 수집하는 건 그의 목표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골프라는 퍼즐, 골프라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같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홈 코스에서 디섐보는 일 년에 딱 한 차례 라운드한다. 골프를 치는 것보다 연습장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걸 더 좋아해서다. 골프장을 시합장이 아니라 실험실로 여기는 셈이다. 연습 그린에도 잘 안 간다. 그는 “퍼트는 대충 마스터했다. 갈 필요 없다”고 말했다.

천재는 아니다.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 등 천재들을 모아 조직하고 이끈 리더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디섐보는 물리학과를 졸업했으나, 영재들이 가는 MIT가 아니라 SMU(서던 메소디스트 유니버시티)를 나왔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천재적 능력이 있다면 열정이다. 디섐보는 “뭔가를 정말 좋아하고 헌신할 수 있다면 그 분야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둘 다 “미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잡스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게 된다”고 말했다. ‘미친 과학자’는 디섐보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인 것 같다. 그의 야디지북에는 ‘MAD(미친)’라고 적혀있다.

성격이 까칠한 점도 닮았다. 잡스는 독선적이었고 남에게 인색해 주위와 갈등이 많았다. 디섐보는 퍼트가 안 된다고 퍼터를 차에 매달고 끌고 다닌 일이 있다. 어린 시절 배구팀에서 다른 선수가 잘 못 하면 “불성실하다”고 화를 냈다. 디섐보에게는 개인 종목이 딱 맞는다. 물론 골프계에서도 욕을 많이 먹긴 했다. 샷 한 번에 8가지 정도를 계산하다 보니 슬로 플레이어다. 잡스처럼 잘난 척하는 그를 동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잡스는 1985년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재기해 금의환향했다. 디섐보도 맷집이 좋다. 지난해 말 망신을 당했다. 그는 “(나는 거리가 많이 나가 파 5홀에서 다 2온이 되니) 마스터스 파 5홀을 파 4로 여기는 등 전장을 파 67로 생각한다”고 큰소리쳤다. 그가 2라운드에서 74타를 쳤을 때 “파 67에서 74타면 7오버파를 친 것”이라는 조롱을 당했다.

이런 일을 한 번 겪으면 웬만한 사람은 한동안 입을 다물 것이다. 자신의 말이 무거운 짐이 돼 자신을 눌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올 초부터 “555야드인 베이힐 6번 홀에서 1온 시도를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이를 위해 그는 겨우내 장타 전문 선수와 함께 거리 늘리기 훈련을 했다.

그 디섐보가 8일(한국시각)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베이힐 골프장에서 막을 내린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했다. 3라운드에 이어 4라운드에서도 압박감 속에 호수 넘기기를 시도했고 성공했다. 베이힐 6번 홀 티잉 그라운드와 그린 사이의 호수는 건널 수 없는 거리로 인식됐다. 파 5홀에서 1온이 될 경우 골프의 기본 개념이 무너진다. 설계자는 한 번에 닿을 수 없을 만큼의 간격을 둔다. 디섐보는 이 거리를 넘겼다. 골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디섐보가 시도하는 혁신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른다. 타이거 우즈는 골프에서 데이터보다 감이 더 중요하다고 봤던 선수다. 하지만 세상이 디섐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골프는 그가 막 페이지를 연 새로운 챕터로 끌려가고 있다. 공은 이미 호수를 넘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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