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7 (월)

LG 박용택 “야구 그만두는 그날, 맘껏 즐기고 싶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야구인생 30년, 마지막 시즌 기다리는 LG 박용택의 ‘추억과 소망’

경향신문

LG 박용택이 일본 오키나와 캠프에서 캐치볼을 하며 몸을 풀고 있다. LG 트윈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LG와 시작부터 운명적인 만남

동기들보다 적은 계약금 제시에

10여차례 협상 끝, 자존심 지켜

20대의 좌절, 30대 부활의 밑거름


누구는 야구를 즐기며 한다는데

솔직히 너무 힘들어 그러지 못해

잊지 못할 순간 꼭 남기게 되길


그렇게 30년이 넘어가고 있다. 1990년 야구를 시작한 박용택(41·LG)은 2020년인 올해 야구 선수로 마지막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 2002년 데뷔 이후로 LG 간판타자로 활약한 박용택은 2018년 자유계약선수(FA)로 2년 계약을 하면서 은퇴를 예고했다.

박용택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있다.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박용택이지만 그에게도 순정 가득한 ‘처음’의 순간들이 있었다. 박용택은 4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야구 인생에서 지나쳐왔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박용택은 자신이 야구를 처음 시작한 시점을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고명초등학교(서울)에 1989년 11월 야구부가 창단이 됐다. 당시 최재호 감독님이 나를 야구 시키기 위해 계속 애를 쓰셨다. 자랑 같지만, 당시 강동구 내에서 나 모르면 간첩일 정도였다. 달리기를 잘했고 키도 컸고 공부도 잘했다”며 웃었다. 어머니는 박용택이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랐고, 농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농구 선수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시기에 학교 야구부가 생기면서 박용택은 운명처럼 야구를 하게 됐다.

경향신문

박용택이 4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하진 기자 hjkim@kyunghyang.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박용택은 1998년 LG에 2차 우선으로 지명된 후 고려대를 거쳐 2002년 LG에 입단했다. 박용택은 “당시에 두산과 LG가 주기적으로 번갈아서 서울팀 지명 지역을 바꿨다. 나 때는 LG의 순서여서 고등학교 1학년부터 나를 보러 스카우트들이 왔다”며 “만약 그때 두산의 지명 순서였으면 두산에 가지 않았을까. LG와 나는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운명과의 첫 만남은 조금 불편했다. 박용택은 신인으로 계약금을 두고 10차례 이상 협상 테이블을 차리는 전례 없는 사례를 남겼다. 당시 동기들 중 주목받는 신인들은 3억원 이상을 받았는데 LG는 박용택에게 2억3000만원을 제시했다. 박용택은 “그 돈 받고 자존심 상해서 안 한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박용택은 당시 구단 관계자에게 ‘어떻게 하면 계약금을 올릴 수 있냐’라고 물었다. 그 관계자는 농담하듯 ‘너 마무리 캠프에 가서 김성근 감독님으로부터 주전급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인 관리도 철저한 김성근 전 감독에게 갓 데뷔한 아마추어 선수가 눈에 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내놓은 얘기였다.

그 싸움에서 박용택이 이겼다. “보여주겠다”라고 한 뒤 조금씩 인정받았고 유니폼을 입고 배번도 받은 채로 마무리캠프에 참가했다. 박용택의 최종 계약금은 3억원으로 점프했다.그때를 떠올린 박용택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때 관계자분들이 제 행동에 얼마나 웃었을까요. 갓 대학 나온 놈이…지금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요.”

박용택의 데뷔는 화려했다. 2002년 4월16일 SK전을 앞두고 콜업돼 대타로 나가서 2루타를 치고 타점을 올렸다. 다음날은 1번타자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3루타에 볼넷에 홈런까지 터뜨렸다. 그러고 보면 야구선수로 그즈음까지는 참 잘 풀렸다.

고명초-휘문중-휘문고-고려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국가대표로도 발탁됐다. 데뷔 첫해에는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갔고 플레이오프 MVP를 타기도 했다. 당시 플레이오프 인터뷰를 위해 기자회견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용택을 김성근 감독이 와락 껴안으며 “고생했다”고 격려하던 장면도 선명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눈물 나는 장면이 참 많았다. 처음으로 흘린 눈물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때였다. 당시 LG는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았고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우승을 내줬다. 당시 좌익수 박용택은 타구가 날아가는 모습을 외야에서 허무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그는 “마해영의 타구가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데 ‘꿈일 거야, 꿈일 거야’라고 생각하다가 경기가 끝났다. 울면서 더그아웃으로 걸어들어갔다”고 했다.

이후 박용택은 야구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참 많이도 울었다. 2003년부터 팀 성적이 내리막을 타면서 박용택도 좌절을 맛봤다. 박용택은 “내가 계속 발전할 줄 알았는데 벽에 부딪혔고 실패의 연속이었다”며 “나 스스로도 감당이 안되는데 팀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고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20대 때는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걸 느꼈다. 돌이켜보면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나름 30대에는 누구한테도 빠지지 않는 야구 선수 생활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용택의 말은 역설적이다. “신인 때로 돌아가면 야구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그간 야구에 쏟아부은 집념이 가득 녹아 있다.

박용택은 “그 정도로 스트레스 받고 노력하면서 다른 일을 했다면 훨씬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야구를 하면서 너무 많이 힘들었다”며 “그래서 난 야구를 즐기면서 한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흔히 말하는 ‘즐기는 야구’는 박용택이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즐기는 야구’를 해본 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박용택은 “참 쉽지 않다. 지금 전지훈련 중인데도 방에 있을 때 (타격을 두고)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고민이 절로 밀려든다. 나도 모르게 올해도 똑같은 행동과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용택은 훗날 정말 잊지 못할 순간이 남아 있길 바란다. “내가 야구를 그만두는 마지막 날, 하루 정도 즐겨보자. 그것만은 나에게 약속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그날이 박용택은 야구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 되기를 꿈꾼다.

오키나와 | 글·사진 김하진 기자 hjkim@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