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9 (목)

이슈 [연재] 중앙일보 '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LPGA 정글 속 ‘초식동물’ 곽민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노는 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골프

시합도중 힘들어 하는 상대 격려

경쟁 치열 투어 생활 늘 체하기도

내년 복귀 땐 성공보다 행복 찾길

중앙일보

곽민서가 LPGA Q시리즈가 열린 파인허스트 골프장 페인 스튜어트 동상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스튜어트는 1999년 이 곳에서 열린 US오픈 우승했다. [사진 곽민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4년 시메트라 투어(LPGA 2부 투어) 헬스케어 클래식 최종라운드 때다. 선두를 달리던 수웨일링(대만)이 흔들렸다. 뒤집어지는 분위기였다. 챔피언조에서 함께 경기하던 곽민서(29)에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곽민서는 수웨일링에게 “괜찮아,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파만 하고 나가면 돼”라고 조언했다. 수웨일링은 안정을 찾았고 우승했다.

곽민서의 어머니는 “딸의 마음이 너무 여리다.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라고 했다. 2011년 2부 투어 이글 클래식 때다. 곽민서는 모 마틴(미국)과 챔피언조에서 경기했는데 졌다. 그리고선 자기가 우승한 것처럼 기뻐했다.

곽민서는 “2부 투어에서 7년을 뛴 모 마틴이 우승하면 1부 투어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너무 간절해 보였다. 부모 대신 그를 키운, 당시 딱 100세였던 할아버지가 직접 응원 나온 것도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곽민서는 어떻게 자랐나. 초등학교 때 1년 여를 캐나다에서 보냈다. 다양한 스포츠를 했는데, 그중 골프도 있었다. 곽민서는 운동을 즐겼고 잘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고양시 골프 대회 나갈 사람?”이라고 물었을 때 손을 번쩍 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회장에 다녀온 뒤 그는 엄마에게 “다른 아이들은 어른처럼 골프를 쳐요”라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릴 때 부터 프로처럼 훈련한다. 그는 캐나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골프채 서너 개 들고 가서 놀다 오는 건 줄 알았다.

‘초등학생은 레드티’라는 대회 요강을 보고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나가야 하는 거로 알 정도였다. 그렇게 순진했다. 레드티는 레이디 티를 뜻한다. 동네 연습장 프로가 “민서는 재능이 있으니 좋은 선생님께 배우게 하라”고 했다. 곽민서는 계속 재미로 했다. 그래도 잘했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

중앙일보

곽민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곽민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코치가 “3개월 전지훈련을 다녀오면 국가대표 상비군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상비군 보장’ 운운은 과장 광고였다. 그래도 전훈 뒤 실력이 확 늘었다.

이후 엘리트 코스로 들어갔다. 몸이 따르지 않았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팔인대가 파열돼 1년을 쉬었다. 마음도 따르지 않았다. 국가대표 포인트 1~2점을 놓고 우정에 금이 가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려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미국으로 갔다. 곽민서는 “어릴 적 캐나다 생활이 그리웠다”고 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다는 2부 투어 생활을 오래 했다. 다들 1부 투어로 가려는 꿈과 정보를 교류하는 동료 의식이 있어 그리 힘들지 않았다.

2012년에는 조건부 LPGA 투어 시드를, 2015년에는 풀시드를 땄다. 곽민서는 마음이 아프면 체한다. 1부 투어에서 자주 체했다. 체할 때마다 바늘로 손가락을 따고 검붉은 피를 닦아냈다. 손톱 주위가 늘 피멍 자국이었다.

골프 투어는 기본적으로 제로섬의 정글이다. 다른 사람이 못해야 내가 이긴다. 한국 선수들은 가장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랐다. 서열 문화도 있다. 강한 자엔 고개 숙이고, 만만해 보이면 괴롭히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한국에서 이렇다 할 성적이 없었던 그는 “‘너는 여기 올 사람이 아니야’라는 차가운 시선을 느낀 적도 많았다”고 했다. 곽민서는 두 시즌을 버티다 2부 투어로 내려갔다.

경쟁에 맞지 않는 성격이라 다시 LPGA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곽민서는 Q시리즈를 통과해 내년 LPGA 투어에 복귀한다. 한국에 귀국한 곽민서를 만났다.

Q : 운동선수가 경쟁 상대를 돕는 건 지나친 거 아닌가.

A : “지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나도 잘하고 싶다. 좋은 흐름을 탄 선수를 축하해 주는 것뿐이다.”

Q : 골프 선수 대부분은 이기기 위해 상대의 좋은 흐름을 망가뜨리려고 한다.

A : “그런 사람도 있지만, 매너가 아니다.”

Q : 타이거 우즈도 예전에 그랬다.

A : “그의 업적을 좋아하지만, 그 사람까지 존경하는 건 아니다. 우즈가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육식동물의 굴에 들어온 초식동물 같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 이미지도 겹친다. 곽민서는 “누구를 이기는 게 내 목표가 아니며, 성공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대견한 듯, 아쉬운 듯 그를 바라봤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