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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장민석의 추가 시간] '홈런왕' 유상철, 건강히 돌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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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한·일 월드컵을 1년여 앞두고 제법 인기를 끈 컴퓨터 축구 게임이 있었다. 축구니까 응당 골을 넣어야 하겠지만 이 게임은 희한하게도 공을 차서 골대를 훌쩍 넘기면 점수가 올라갔다.

게임의 이름은 '홈런왕 유상철'. 힘이 넘친 나머지 중거리 슛이 골문을 한참 벗어나 '홈런볼'처럼 관중석 어딘가에 자주 꽂히곤 했던 유상철을 희화화한 플래시 게임이었다.

2002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유상철이 '홈런' 대신 통쾌한 중거리 슛으로 골망을 가르자 '홈런왕 유상철' 제작자는 2탄을 내놓았다. 유상철을 놀리는 게임이 생각지도 않게 큰 반응을 얻어 미안한 마음이 컸던 제작자는 폴란드전이 끝나자마자 공개한 후속편에선 유상철을 영웅으로 등장시켰다. 유상철이 히딩크 감독을 납치한 안톤 오노(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할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의 실격을 유도한 쇼트트랙 스타)를 강슛으로 날려버리는 내용을 담았다. 2탄의 제목은 '홈런왕 유상철, 히딩크를 구해줘'였다.

'홈런왕'은 월드컵에서 정말 히딩크를 구해냈다. 한국 축구사에 최고 명승부로 남아 있는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유상철은 중앙 미드필더와 왼쪽 스토퍼, 센터백 등 한 경기에서 세 가지 포지션을 소화했다. 승부를 뒤집기 위해 히딩크가 수비수를 빼고 공격수를 투입할 때마다 생긴 빈자리를 유상철이 잘 메워주면서 한국은 기적 같은 2대1 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었다.

유상철은 수비수와 미드필더, 공격수 세 포지션에서 모두 K리그 베스트11에 뽑힌 역대 최고 '멀티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지도자로는 만능이 되지 못했다. 그가 맡은 대전과 전남은 하위권을 전전했다.

"실패한 감독으로 기억되는 게 두렵다"던 그는 지난 5월 인천 사령탑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인천이 리그 막판 2부 리그 강등을 피하기 위한 살얼음판 경쟁을 펼치던 도중 유 감독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그는 19일 팬들에게 자신이 췌장암 4기라는 사실을 밝혔다.

팬들은 유상철 감독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투혼을 기억하며 병마와의 싸움도 이겨낼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는 2001년 컨페드컵 멕시코전에서 전반 코뼈가 부러지고도 경기 종료 직전 머리를 들이밀어 헤딩 골을 터뜨리며 2대1 역전승을 이끌어낸 적이 있다.

유상철은 고교 때부터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아 선수 생활 내내 한쪽 눈으로 공을 보고 달렸다. 전남 감독 시절엔 무릎 통증이 심해 목발을 짚어야 했지만 선수들 앞에서 그럴 순 없다며 버텼다. 그 투지가 어디 갈 리가 없다. 그는 올 시즌 인천의 1부 리그 잔류를 위해 치료를 병행하며 끝까지 벤치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2002년 유상철 덕분에 우리는 많이 웃었다. '홈런왕'도 어느새 애칭이 되어버렸다. 이젠 왕년의 '홈런왕'이 건강하게 돌아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줄 차례다. 유상철 감독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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