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일각 "6개월 버티기 어렵다"
일본은 당황하고 있으며 미국은 우려하고 있다. 국내 재계에서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공포감이 번지고 있다. 실제로 지소미아 중단 결정 후 <이코노믹리뷰>와 만난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최악의 상황"이라며 고개를 내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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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쁜 행보
일본은 지난달 4일 한국을 겨냥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 제한 조치를 시작한 후 2일 각의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7일에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국제조약을 파기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화이트리스트 확정안이 담긴 정령(한국의 시행령)을 공포, 관보에 게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 각의가 열리던 2일 즉각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강경한 반일 메시지를 내놨으며, 대표적인 지일파로 알려진 이낙연 국무총리도 "일본의 잇따른 조치는 한일 양국, 나아가 세계의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적 경제협력체제를 위협하고 한미일 안보공조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수출제한 3대 품목을 포함한 총 100개 전략 소재 품목을 지정해 집중적으로 투자, 5년 내 공급안정을 이루겠다는 로드맵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기업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일본 경제보복 직후 현지로 날아가 소재 및 부품 수급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최근에는 ‘탈일본’에도 일부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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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숨가쁘게 전개되는 가운데 두 나라의 외교부 장관은 태국 방콕, 중국 베이징에서 연이어 회동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광복절 직후인 16일이나 17일 아키바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전격적으로 회담을 갖기로 했으나 역시 불발됐다.
다만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면서도 세부수칙을 정하지 않는 등 확전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 비슷한 장면을 연출, 최소한의 여지를 남기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아베 총리는 지난 13일 오봉 명절을 맞아 지역구인 중의원 야마구치현 제4선거구에 방문해 “민민간의 일은 민민 간에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며 민간분야의 교류는 유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한국에 수출규제를 걸었던 포토레지스트를 두 번이나 허가하는 등 일부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축사에서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면서 "공정하게 교역하고 협력하는 동아시아를 함께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보복이 이어지고 있으며, 극일 메시지는 유지하면서도 대화의 여지를 남겼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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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으나 최근 한국과 일본 모두 확전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 사실이다.
미국도 중재에 나설 가능성도 높아졌다. 현재 미국은 중국과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홍콩사태를 두고도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발사체 도발 및 군비경쟁이 벌어지며 동북아시아 전역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그 연장선에서 미국은 아시아의 중요한 동맹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관건은 지소미아다. 업계 일각에서 한국이 지소미아 연장을 선택하면서 일본에 퇴로를 열어주면, 미국의 중재로 이번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최근 래리 해리슨 주한 미국대사가 국내 경제인들과 만나 한일갈등을 원만하게 풀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등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22일 지소미아 중단을 선택하면서 상황은 시계제로 상태가 됐다. 전조는 있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중국 베이징에서 21일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담 참석하러 출국하며 지소미아를 두고 "연장 여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면서 "상황이 매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 중단 카드를 선택한 이유는 다양하다. 최근 일본이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였으나 이는 추후 정밀타격을 위한 숨 고르기라는 분석이 많았고, 무엇보다 실리적 측면에서 지소미아가 종료되어도 안보상황에 큰 문제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 지소미아는 2016년 11월 처음 체결됐으며, 그 동안 양국간 정보교류 횟수는 29회에 그친다. 나아가 일본이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강공모드를 택했다는 주장도 있다. 국내에서 불고있는 반일감정을 고려한 정치적 선택이라는 말도 나온다.
일본은 충격과 당혹감에 휘말렸다.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남관표 주일 대사를 초치한 뒤 담화를 통해 "지소미아는 안전보장에 있어 한일 관계를 강화하고 지역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인식으로 매년 자동 연장됐다"며 "한국 정부의 조치는 유감"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최근의 분위기로 보면 지소미아 연장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에 충격은 더 크다는 반응이다. 아사히는 "지소미아 중단으로 한일은 물론 아시아 안보 환경이 변할 것"이라고 보도했으며 니혼게이자이는 "한미일 안보협력이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도 부정적이다. 미 국방부 데이브 이스트번 대변인은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한다"면서 "우리는 가능한 분야에서 일본, 한국과 함께 양자 및 3자 방위와 안보 협력을 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일 두 나라의 신뢰관계 회복을 바라면서도 한국 정부의 판단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셈이다. 다만 청와대는 지소미아 중단을 두고 "폐기가 아닌 중단"이라면서 "미국과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했다"고 말했다. 한미동맹이 이 정도 문제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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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지옥문 열린 것"
재계도 충격이다. 지소미아 연장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된 상황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일 경제전쟁이 잦아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일본은 예정대로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가능성이 높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이 물러나지 않고 강대강 대응을 시작할 것으로 본다"면서 "지금 당장의 먹거리가 타격을 받는 것도 문제지만, 일본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 먹거리를 정밀타격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며 1100개 물품에 대한 수출규제를 추진, 이 과정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보여주며 시스템 반도체 등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공포다.
평택에 기반을 두고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중소 부품업체를 운영하는 A사 대표는 "일본이 강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막판에는 약간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나"라고 반문하며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 카드를 최대한 끌며 대화를 시도했어야 했다. 너무 성급하게 중단을 결정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무역업체를 운영하는 B사 대표는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269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59%의 기업이 일본 수출규제에 버틸 수 있는 기간을 6개월 미만이라고 답했다. 그 중 우리도 포함된다"면서 "외교적 해결이 필요했는데, 사실상 무역으로 먹고사는 이들에게는 지옥문이 열린 것"이라고 성토했다.
대기업에 납품 등 관계를 맺지않고 독자적으로 일본과 거래하는 한 화학업체 C사 대표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은 그나마 비빌 언덕이라도 있다"면서 "이번 갈등이 한미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도 상황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라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기업들이 탈일본을 준비, 자체적으로 부품 및 소재 수직계열화에 나서면 중소기업들은 설상가상의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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