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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연재] 스포츠서울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엘리트체육 무용론과 체육 생태계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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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진보는 다양성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 다양성은 차이를 인정하는 공존(共存)의 텃밭에서만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대척점에 서있는 획일성은 어찌보면 가장 폭력적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치환시킨 뒤 배제된 타자(他者)를 향해 가하는 획일성의 폭력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획일성이 지배와 통치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쓰여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게다. 3년 전 체육의 패러다임을 바꾼 체육단체 통합은 분절된 체육을 하나로 묶어내는 의미깊은 정책결정으로 기대감이 컸다. 이러한 패러다임 시프트에는 새로운 체육 생태계 구축이라는 큰 밑그림이 깔려 있었다. 사실상 엘리트체육밖에 없었던 한국의 체육 토양을 생태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재편하려는 시도는 명분에 맞았기에 박수를 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책 변화의 배경이 됐던 새로운 체육 생태계란 결국 체육의 다양성 문제와 연결돼 있다. 엘리트체육과 생애체육 그리고 학교체육 등이 한데 어우러지며 시너지효과를 불러 일으키는 선순환 시스템, 이게 바로 체육단체 통합이 꿈꾼 새로운 체육 생태계가 아닐까. 그러나 최근 체육계의 움직임은 자못 걱정스럽다. ‘조재범 사태’로 촉발된 ‘체육계 미투’가 한국 체육의 구조개혁을 선도하는 방향으로 이어진 것까지는 좋았지만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이상한 쪽으로 치닫는 것 같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더 이상 금메달은 필요없다”는 둥 체육의 근본적 가치를 부정하는 듯한 움직임은 물론 엘리트체육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어서다. 시대정신과 시민사회의 눈높이에 맞는 엘리트체육의 개혁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지만 엘리트체육 무용론으로 들리는 소년체전 폐지와 같은 섣부른 정책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소년체전은 한국 체육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선 여전히 효과적인 정책이라는 게 체육계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중국은 한국 체육의 비결로 소년체전을 꼽고 이를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가 심사숙고해 벤치마킹한 제도를 우리 스스로 폐기하는 건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그동안 소년체전을 치르면서 간과했던 몇 가지 문제점은 이 기회에 고쳤으면 좋겠다. 어린 학생들이 참여하는 전국적 규모의 대회인 만큼 ‘러브호텔’ 등 유해 숙박시설을 피하는 게 우선 해결해야할 과제다. ‘공부하는 학생선수’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소년체전을 종목별 소규모 대회로 전환해 학습권을 최대한 지키는 방향으로 개편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제도의 변화는 정확한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이 생명이지만 최근 치닫고 있는 엘리트체육에 대한 날선 공격은 다분히 정치적이며 선동적이다. 물론 그동안 엘리트체육이 권위주의 정부의 스포츠국가주의(state amateurism)를 등에 업고 폭력과 비리 등 각종 문제점 해결을 등한시 한 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금메달의 광휘(光輝)에 간과됐던 개인의 인격과 가치를 이 참에 살려내면서 진정한 체육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라도 엘리트체육에 대한 수술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건 엘리트체육에 대한 개혁이 엘리트체육에 대한 전면 부정과 폐기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엘리트체육과 생애체육의 가치는 똑같이 중요하다. 과거에는 엘리트체육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우선시됐지만 지금은 둘 다 존중받아야하는 그런 시대가 됐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성은 필연적으로 흑백논리로 치닫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이들을 적으로 몰아붙여야 자신의 논리가 쉽게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고안된 프레임이 바로 허구적 관념의 실체화다. 허구적 관념의 실체화란 권력에 의해 날조돼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여기게 된 사회적 생각을 일컫는다. 팩트의 진위여부를 떠나 허구적 관념을 실체화한 뒤 모든 문제를 이 프레임에 집어넣으면 논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극렬한 내전을 겪고 복잡다단한 모순구조를 지닌 한국사회에선 이념 갈등이 첨예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문제를 이념이라는 프레임에 집어 넣어 돌리면 만사형통이다.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빨갱이’라는 프레임은 허구적 관념의 실체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작금의 체육계 논쟁도 그렇다. 모든 체육의 폐해를 엘리트체육으로 돌리는 허구적 관념의 실체화가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양새다. 다양한 수종(樹種)이 함께 어우러지며 혼재돼 있는 게 바람직한 체육의 생태계일진대 한 가지 수종으로 전면 교체하겠다고 떠드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어찌할꼬. 가슴이 미어지고 답답하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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