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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이슈 [연재] 스포츠서울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택견과 태권도의 유쾌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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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스포츠는 기예(技藝)의 과학이다.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기술개발은 물론 예술적 경지의 승화가 필요한데 여기엔 과학적 기법이 총동원된다는 얘기다. 끝없는 한계의 도전, 그게 바로 스포츠의 본질이요 정신이다. 인간이 생명의 유한성이라는 태생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명제는 스포츠와 관련해 심오한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에서 불멸(不滅)을 추구하며 거기에서 쾌감을 느끼곤 한다. 나약한 인간이 스포츠를 통해 불사(不死)의 신의 영역을 추체험(追體驗)한다는 사실은 스포츠의 숨어 있는 상징코드를 읽을 수 있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스포츠의 진화와 발전에는 늘 그렇듯 실험정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수영의 ‘플립 턴(flip turn)’이나 높이뛰기의 ‘배면뛰기’는 수평적 사고를 수직적 사고로 전환한 스포츠 혁신의 전형으로 꼽힌다. 최근 한국 스포츠에서도 ‘17세 태권소녀’가 몰고온 혁신의 새 바람이 무섭다. 주인공은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태권도 여자 49kg급 대표로 선발된 강보라(17·성주고2년)다. 태권도에 택견을 접목한 그의 융·복합 실험정신은 올해들어 꽃을 피웠다. 직선운동인 태권도에 춤을 추는 듯한 곡선운동인 택견을 접목한 그의 태권도는 그야말로 개성이 넘친다. 2016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소희(한국가스공사), 2017무주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 심재영(고양시청) 등 내로라는 강호들이 능청대고 굼실대는 그의 발길질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아시안게임 태극마크를 보란듯 단 강보라는 아버지의 주도면밀한 로드맵에 따라 만들어진 멋진 작품이다. 강보라의 아버지 강호동씨는 태권도 공인 7단에 택견전수관을 운영 중인 이색 무도인이다. 태권도 입문 후 택견을 19년째 수련하고 있는 강 관장은 두 무술의 접점을 자식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강보라는 택견을 몸에 익힌 덕분인지 접근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태권도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김종기 총 감독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택견의 ‘품밟기’가 태권도 스텝보다 반 박자 정도 빠른 것 같다. 아마도 이게 그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춤을 추는 듯 삼각형을 만드는 보법(步法)인 품밟기는 택견 기본기의 정수다. 스텝 움직임이 한자의 품(品) 자를 연상시켜 품밟기로 불리는데 이는 상당히 과학적이다. 이걸 제대로 익히면 전진 및 사이드 스텝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 상대의 리듬감을 무너뜨리는 데 그만이다. 강보라의 또 다른 강점은 접근전에서 다득점을 올릴 수 있는 플레이 스타일이다. 이 또한 택견수련에서 비롯됐다. 태권도는 짧은 거리에서 얼굴을 가격하기 힘들지만 택견은 그렇지 않다. 품밟기에서 터득한 리듬감이 바탕이 된 덕분에 접근전에서도 상단차기가 가능해 다득점의 화끈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강보라는 최근 막을 내린 2018코리아오픈대회에서도 파상적인 공격력을 뽐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에서 만난 이란의 말라코티칸 마리얌을 50-12로 꺾은 것을 비롯해 세 경기 연속 20점 차의 대승을 거둬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바야흐로 서로 다른 분야의 장점을 취해 새로운 지평을 여는 통섭(統攝)의 시대다. 택견과 태권도는 같은 뿌리라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각자의 길만 걸었다. 평행선처럼 달린 그 안타까운 시간에 17세 ‘태권소녀’ 강보라가 마침표를 찍었다. 태권도와 택견의 만남,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스포츠의 실험정신이 반갑기 그지없다.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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