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4 (월)

[홍윤표의 발 없는 말]구시대의 유물, 위장타순은 살아 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승엽(31. 요미우리 자이언츠)이 긴 침묵을 깨고 모처럼 2안타를 날린 지난 5월15일, 요코하마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요코하마의 선발 출장 선수 오더의 7번타순 우익수 위치에 ‘요시미 유지’라는 투수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위장오더’였다. 요코하마측이 요미우리 선발투수가 우완인지, 좌완인지 확신이 서지않아 등판할 계획이 전혀 없는 엉뚱한 투수를 버젓이 오더지에 올린 것이다. 요코하마는 물론 경기 시작하자마자 우익수를 곧바로 교체, 우타자인 후루키 가쓰아키를 그라운드에 내보냈다. 요미우리 선발투수가 좌완인 후쿠다였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유물, 위장오더가 일본프로야구판에서는 아직도 힘을 쓰고 있다. 선발투수예고제를 채택하고 있는 퍼시픽리그와는 달리 예고를 하지않는 센트럴리그에서는 이같은 위장오더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볼 수 없는 위장오더는 플래툰시스템(좌-우투수에 따라 우-좌타자를 기용하는)을 중시하는 일본의 독특한 타순짜기라고 볼 수 있다.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위장오더는 일본인 감독 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물을 먹은 미국 출신 감독들도 가끔 사용하고 있다. 작년에는 니혼햄 파이터스의 트레이 힐만(44) 감독이 5월31일 요미우리와의 교류전(삿포로돔구장)에서 위장오더를 낸 적이 있다. 7번 3루수 자리에 전날 등판했던 에이스 다르빗슈를 오더에 넣었다가 요미우리가 좌완 다카하시 히사노리를 선발로 내보내자 우타자 다나카로 바꾼 것이다.

이같은 위장오더는 프로야구 도입 초창기 우리나라에서도 횡행했다. 특히 김영덕, 김성근 같은 재일교포 출신 지도자들이 상당히 애용했다.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1991년 7월1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경기 시작 1시간 전(한국은 1시간, 일본은 30분 전에 오더를 교환한다)인 하오 5시께, 박찬황 구심이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양 구단의 오더를 받았다. 엄밀하게는 동시 교환이 아니라, 해태측이 먼저였다. 박찬황 구심이 해태 김봉연 코치가 건네는 선발선수 명단을 받아드는 순간, 찰나를 비집고 삼성 배대웅 코치가 “(선)동렬이죠?”라고 물었다.

박 구심이 무심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배 코치가 누런 서류 봉투에서 오더지를 꺼내 구심에게 전달하려했다. 그 순간, 김봉연 코치가 “왜 우리쪽 투수를 먼저 얘기하느냐”며 급제동을 걸었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라 해태측은 이미 작심하고 나온 듯했다.

김 코치는 해태 오더를 되찾아 들고 오더 교환을 거부하며 박 구심에게“봉투 안을 한번 보시라”며 손으로 상대팀 봉투를 가리켰다. 이상한 느낌이 든 박 구심이 봉투안을 살펴봤지만 원정기록지가 잔뜩 들어 있어 처음에는 잘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윽고 같은 날짜의 다른 오더지 한 장을 찾아냈다. 당초 삼성측이 제출한 오더지에는 좌타자가 4명(선동렬용)이었으나 감춰놓은 다른 오더지에는 좌타자가 박승호 단 한 명이었다. 만약 상대투수가 좌완(김정수)이었다면 감춘 오더를 내밀 작정이었다.

해태측의 강력한 반발이 일었던 것은 당연한 노릇. 김응룡 감독은 노발대발, “사기극”이라고 펄펄 뛰면서 “왜 심판이 우리 투수를 상대팀에 먼저 말하느냐, 총재(이웅희)와 통화하겠다”고 본부석 부근에서 언성을 높였다.

김응룡 감독은 잠시 후 해태쪽 덕아웃으로 찾아와 사과하는 배대웅 코치에게 “네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 그렇게 하라고 한 너희 감독하고 심판이 잘못이지”라고 대답한 뒤 하오 5시45분께 오더교환을 승낙했다.

김성근 감독은 그 때“가끔 이건지 저건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오더를 2장 작성할 때가 있다. 그날도 2장을 쓴 뒤 배코치에게 아무거나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을 내라고 했다”는 해명성 발언을 했다. 아무튼 해태는 불편한 기색으로 경기를 시작했으나 공교롭게도 믿었던 선동렬이 김용철과 박승호에게 3점 홈런을 얻어맞는 등 패색이 짙어지자 7회부터 빈볼, 판정항의 등으로 이전투구식 승부를 연출했다.

그 경기는 결국 삼성이 7-1로 이겼고 선동렬은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이 소동으로 박찬황 심판은 KBO 상벌위원회에 회부돼 벌금 20만 원, 김성근 삼성 감독은 엄중경고 조치를 받았다.

그 무렵 야구를 담당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김영덕, 김성근 두 감독의 경기 취재를 할 때, 위장타순으로 등장한 선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어서 기록지가 지저분해진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낭자했다.

위장오더가 하도 일상화 되다보니 일본프로야구 기록원들은 아예 위장타순의 수비위치 숫자(투수 1부터~우익수 9까지) 앞에 ‘A’자를 붙여 구분해서 적어놓는다. 이를테면, 15일 요코하마의 경우처럼 7번 타순에 ‘A9’로 표기하는 것이다. 즉 위장 우익수라는 뜻이다. 물론 그네들끼리 약속한 식별법이다. 여기서 ‘A’는 일본어 아테우마(あてうま=들러리, 또는 들러리 후보의 뜻으로 원래는 씨말이 올 때까지 발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암말에게 임시로 짝지어주는 숫말을 일컬음)의 맨앞글자를 알파벳으로 표기한 것이다.

선발투수예고제를 실시한 1998년 이후(2000년 1년간 중단됐다가 2001년에 재개) 한국프로야구판에서 위장오더는 사라졌다. 여론의 질타를 받아온 데다 웬만하면 상대편 선발투수를 예측할 수 있게끔 로테이션이 거의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투수 분업화가 이루어지고, 변칙적인 투수기용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흐름 탓이기도 할 것이다.

홍윤표 OSEN 대기자

사진 위=5월15일 위장오더를 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본거지인 요코하마구장 전경.

사진 아래=이승엽이 지난 3월30일 요코하마와의 개막전에서 홈런을 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며 하라 감독의 환영을 받는 모습.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