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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1948년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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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1948년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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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57년 1월 15일 69세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1920년대 신문에는 ‘독립단’ ‘독립군’ 소식이 자주 실렸다. ‘무기가 정돈된 독립단의 위세 맹렬’(1920년 5월 22일 자 석간 3면), ‘국경 지방에 배일(排日) 조선인 3만’(1920년 6월 17일 자 석간 3면), ‘32회 국경을 돌입한 조선인 OO군의 전투’(1920년 6월 20일 자 석간 3면) 등 중국·만주 지역 독립군 소식을 전했다.

독립단원의 이름도 나온다. 1921년 7월 9일 ‘영안현 부근에서 독립단의 신계획’이란 기사에서 “독립단 수령 최명록 홍범도 김종헌 이청대 등은 사령부를 설치하며 다시 사관생도를 모집해”라고 전했다. 위 기사에서 ‘이청대(李靑大)’는 ‘이청천(李靑天)’의 오기로 추정된다. 이청천은 지청천(池靑天·1888~1957)이 독립운동 시기 쓰던 이름이다.

본명은 지대형(池大亨). 1914년 일본 육사를 졸업(26기)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중위 때인 1919년 일본군을 탈출해 남만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정의부, 한국독립군, 낙양군관학교 등 독립운동 무장 조직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창설한 광복군 총사령을 지냈다.

1921년 7월 9일자.

1921년 7월 9일자.

‘이청천’ 이름은 1920년대 초반 독립단(독립군) 기사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무관학교를 건설/ 사오백명을 수용 교수 중/ 중국 액목현에 있는 독립군들이/ 무기도 있고 조직도 완전하다고’(1923년 9월 12일 자 3면), ‘사관학교 금월에 개학/ 지원자가 삼백명이라고’(1923년 9월 18일 자) 등이다.

1923년 9월 12일자.

1923년 9월 12일자.

“남만주 액목현 지방에 근거를 둔 조선인 독립단에서는 전부터 보위단(保衛團)과 협력하야 제구국민학교(第九國民學校)의 명칭으로 사관학교를 설립코자 계획하든 바 지난 칠월 하순 경에 영고탑(寧古塔) 방면으로부터 다수한 무기를 수입하얏슴으로 학교 설립의 의론이 구체화하야 이추산 이청천 등 육인이 교수를 담임하얏는데 구월 상순부터 개학하리라 하며 학생은 약 삼백명의 지원자가 있다더라.”(1923년 9월 18일자 석간 3면, 일부 현대어)

지청천은 매년 국치일(8월 29일)이면 동지들과 밥을 굶으며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시절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자.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2024년 5월 7일 자 A20면)라고 연설했다.


이승만 환국과 이청천(지청천) 귀국을 전한 1947년 4월 22일자.

이승만 환국과 이청천(지청천) 귀국을 전한 1947년 4월 22일자.


지청천은 광복 후에도 중국에 머물다 1947년 4월 21일 이승만과 함께 중국 군용기 편으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가 미소공위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해 1946년 12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4개월여간 유엔 등에서 외교 활동을 벌인 뒤 중국에서 장제스 주석과 만나 ‘조선 문제’를 논의하고 지청천과 함께 돌아왔다. 1947년 4월 22일 자 조선일보 1면에는 ‘건국 대사(大事)로 미중 역방(歷訪)/ 이승만 박사 작일 환국’ 기사와 ‘이청천 장군 귀국’ 기사가 함께 실렸다.

2024년 5월 7일자 A20면.

2024년 5월 7일자 A20면.


지청천은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초대 내각의 정무장관 격인 무임소장관에 임명됐다. 앞서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서울 성동구에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인 4만1532표를 얻었다. 1950년 2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됐다.

지청천의 장례식은 1958년 1월 21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각계 인사와 학생 등 1만여 명이 중앙청 광장에 모여 애도했다.


“영구는 자택으로부터 영결식장인 중앙청 광장에 있는 음악당 위에 안치되었고 이어 각계로부터 모여드는 인사들과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등 약 일만여 명이 집합된 가운데 민의원 임흥순(任興淳)씨의 사회로 10시 정각부터 엄숙한 장의식은 시작되었다. (중략) 장의위원장 함태영(咸台永)씨는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악전고투 칠십년의 풍파 많았던 선생은 우리 민족에 귀감이 된다”는 요지의 식사를 말하였으며…”(1957년 1월 22일 자 석간 3면)

지청천 장군 사회장. 1957년 1월 22일자 3면.

지청천 장군 사회장. 1957년 1월 22일자 3면.


지청천 가문은 2024년 5월 병역 명문가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아들 지달수는 광복군 중령, 손자는 육군 하사, 증손자는 육군 병장으로 병역 의무를 마쳤다. 외손자 이준식은 제11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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