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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뜨락]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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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뜨락]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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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눈이 오더니 벌써 여러 차례 흰 눈이 내렸다.

지난해에는 겨울에도 눈이 안 와 가뭄을 걱정했는데 눈이 하얗게 내려 마당을 덮고, 오래 비워 두었던 마음의 자리까지 채운다.

저녁 약속 때문에 어두워진 시간에 귀가했다.

집에서 주차장이 제법 멀지만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야옹이가 어디선가 뛰어와 마중을 한다.

야옹이와 함께 걷는 겨울밤, 발밑에 눈 밟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따라 걷다보니 어릴 적 긴 겨울밤, 친구들과 동네 마실 다니던 생각이 난다.


그 시절에도 발밑에서 사그락사그락 눈을 밟는 소리에 장단을 맞춰 걸었다.

달 밝은 밤, 논에서 벼를 베고 남은 밑둥을 밟으며 걸으면 소리가 더 신나게 사그락거렸다.

여름밤 멍석을 펴고 모깃불 피워놓고 밤하늘의 별을 세던 추억도 있었지만 낮 동안 농사일로 고단하신 어르신들이 일찍 주무셨기 때문에 옛날이야기는 주로 겨울밤에 듣는 것이 제격이었다.


겨울밤에 마실을 다니기에는 날씨가 추웠지만 옛날이야기를 잘 하시는 어르신들을 찾아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잘하시는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시던 이야기로 긴 겨울밤은 재미났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뒷간에서 나오는 무서운 귀신 이야기, 콩쥐 팥쥐부터 장화홍련, 효녀 심청이가 쌀 삼백 석에 팔려가는 이야기 등은 우리들을 울고 웃게 했다.


어린 시기에 읽어야 하는 필독 동화를 우리는 어른들이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로 섭렵 했다.

어두운 등잔불을 켜고 누렇게 바래고 세로로 쓰인 활자가 박힌 얘기책을 음율을 넣어 읽어주시곤 했다.

얘기를 좋아하면 게을러진다는 어른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얘기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물론 이야기의 내용은 몇 번씩 반복되어 결말까지 다 알고 있어도 재미났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어 함께 가슴 졸이고 슬퍼하고 했다.

지금은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시절엔 저녁을 먹고 나면 호롱불 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긴 겨울밤이 깊어지면 밤참 먹는 또 다른 재미도 있었다.

윗방에 있는 퉁가리에서 꺼낸 고구마나 텃밭에 묻어둔 무를 가져다 깎아 놓고 시원하다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먹었다.

운이 좋은 날은 어머니께서 얼음조각이 둥둥 떠 있는 동치미국에 메밀묵을 말아 볶은 김치를 넣고 화롯불에 데워가며 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른들의 옛날이야기가 시작되는 서두에 나오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 청년들이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누구네 집 닭장에서 닭을 서리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동네 어른들은 누구의 소행인지 아시면서도 눈감아 주시기도 했던 것 같다.

더러는 친구들과 자기네 집 닭장 문을 열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때는 동네 아이들을 온 동네 어른들이 모두 자식처럼 같이 키웠다고도 생각된다.

아이들의 잘못을 보면 어른들 누구라도 꾸짖으며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설날이면 남자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거나 덕담을 들었나 보다.

여자인 나는 정월 초하루에 남의 집에 가면 안 된다고 훈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이 부러웠다.

세배를 받던 어른들은 다 가시고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와 있다.

지금은 긴 겨울밤이 어둡지도 않을뿐더러 세배를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각자 사이버 세상에 빠져 있다.

갑자기 단발머리한 아이가 따뜻한 양지 쪽에 고무줄을 메어놓고 껑충껑충 뛰면서 부르던 노랫말이 생각나 흥얼거려 본다.

"정 이월 다 가고 삼월이 오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 오면은 이 땅에도 봄이 온다네∼" 지금 생각하니 고무줄놀이를 하느라 뜻도 모르고 노래로 불렀던 것 같다.

마치 뜻도 모르는 팝송을 부르듯이 말이다.

나는 오늘 강남 갔던 제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화단의 노란 복수초가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제 몸의 열로 얼음을 녹이며 피는 '얼음새꽃'이라고도 불리는 복수초가 피면 곧 봄이 올 테니까….

장용숙 수필가 겨울,계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