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병대 소속 말 ‘레클리스’(Reckless)는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 인근 전선에서 탄약과 보급품을 나르던 군마였다. 1952~53년 ‘네바다 콤플렉스’(연천군 일대) 전투에서 전선과 후방을 오가며 짐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는 역할을 했다. 처음엔 조련을 맡은 하사관의 교육이 필요했지만, 두어번 만에 보급로를 외워 혼자서도 전선으로 보급을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전설처럼 여겨지는 활약은 1953년 3월 ‘판문점-베가스 고지 전투’에서 하루 동안 56㎞, 보급로를 51차례나 왕복하면서 5톤의 탄약을 혼자 나른 일이다. 그야말로 이름처럼 무모한 헌신이었다. 레클리스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해병대 역사상 최초로 계급장을 부여받은 말이 됐다. 미국 퍼플하트 훈장, 유엔 종군 훈장 등 10개 이상의 훈장도 받았고, 1997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과 함께 잡지 ‘라이프’가 선정한 ‘미국 100대 영웅’에 꼽히기도 했다.
레클리스의 한국 이름은 ‘아침해’였다고 한다. 경주마였던 어미 말의 이름을 딴 것인데, 당시 지휘관이었던 앤드루 기어 중령의 전기를 바탕으로 쓰인 책 ‘한국전쟁 감동 실화, 레클리스’(2025)는 그 혈통을 제주 토종 조랑말과 서양 경주마 ‘서러브레드’의 혼혈로 추정한다. 오늘날 ‘한라마’라 불리는 품종이다.
한라마는 체고가 130~150㎝ 정도의 중형 말인데, 제주마보다는 크고 서러브레드보다는 작다. 1990년 제주에 경마장이 생기면서 제주마만으로는 경주마 수가 부족하자 한라마도 경기에 투입되기 시작했고 대량 번식이 이뤄졌다. 그러나 제주마의 체고 기준(137㎝)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한라마를 굶기거나 발굽을 과도하게 깎는 등 동물학대 논란이 일었고, 혈통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2023년부터는 경마에서 ‘퇴출’되고 만다.
폐혈관이 터질 때까지 달리지 않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한국마사회와 제주도는 한라마를 승마·교육·육용으로 돌리는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용도’가 애매해진 한라마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한달 전, 제주 유명 승마장에서 한라마를 불법 도축한 정황이 포착됐다. 2024년 제주도는 전쟁 영웅을 기린다며 애월읍 ‘렛츠런파크 제주’에 레클리스 기념 동상을 세웠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추앙받거나 버려지는 현실이 어디 말뿐이겠냐마는, 병오년 한해만큼은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봤으면 한다. 현재 국내 한라마는 6600마리 안팎으로 추정된다.
김지숙 지구환경부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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