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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상 칼럼] ‘김병기 녹취’ 공개에 진짜 기겁할 사람

조선일보 정우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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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상 칼럼] ‘김병기 녹취’ 공개에 진짜 기겁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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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체포안 가결되자
金 “민주당, 개가 된 날”
친문서 친명 ‘환승연애’

김병기 벼랑 끝 순간에
갑자기 공개된 녹취록
타깃은 김병기 너머에
2023년 7월,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병기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책의원총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뉴스1

2023년 7월,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병기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책의원총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뉴스1


2023년 9월,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이 당내 이탈표로 가결된 날, 김병기는 “역사는 오늘을 민주당 의원들이 개가 된 날로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당을 향해 개라고 하는 건 주군에게는 충성을 맹세하고 반대파에게는 전쟁을 선포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 대표에게 “이제 칼날을 뽑아달라”고 했다. 이듬해 총선 때 김병기는 수석 사무부총장, 공천관리위 간사, 검증위원장으로 ‘비명횡사’ 공천을 주도했다. 손에 피가 흥건했지만 ‘이재명의 호위 무사, 블랙 요원’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문재인 대표 시절 친문으로 영입돼 “문재인의 그림자가 되겠다”고 했던 김병기의 ‘환승연애’였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런 이력 때문에 김병기는 당내에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김병기나 강선우나 보좌진 폭로로 위기를 맞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여가부 장관에 내정됐던 강선우는 변기 청소와 갑질이 문제가 됐다. 보좌관들이 폭로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이다. 그러나 김병기는 다르다. 원내대표로 출마했던 지난 6월 아들 국정원 취업 청탁 의혹부터 강선우 공천 뒷돈 의혹까지 그를 겨냥한 6개월의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민주당 사람들 표현을 빌리면 김병기를 향해 날아드는 공의 구질이 다양하고, 어디서 공이 날아올지 예측도 힘들다는 것이다. 아들 특혜 채용, 호텔 숙박권, 보좌관 갑질까지는 보좌관 수준에서 가능한 폭로다. 그러나 공천 뒷돈 녹취 공개는 김병기나 강선우 개인이 아니라, 민주당 전체와 대통령에게까지 충격을 줄 수 있는 핵폭탄이다. 보좌관 몇 명이 쿵짝할 사안이 아니다. 프로들은 안다. 이게 아마추어들의 장난인지 전문가 솜씨인지.

김병기는 정치 인생의 화양연화에서 추락했다. 그가 충성을 다했던 인물이 대통령이 됐고, 그 덕에 거대 여당의 이인자까지 올랐다. 야당도 이런 권력자에게는 선뜻 손을 대지 못하는데 권력 초반기부터 당내 견제가 이어졌다. 작년 9월 김병기가 야당과 특검법을 합의하자 정청래 대표는 공개적으로 “지도부 뜻과 다르다”고 했다. 지도부는 당 대표와 원내대표인데 원내대표의 협상을 당 대표가 남 이야기하듯 비난했다. 김병기가 기자들에게 존칭도 없이 “정청래에게 공개 사과하라고 하라”고 말할 정도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는데, 대충 봉합하고 넘어갔다. 곧이어 민주당 지도부 1명이 ‘한덕수·조희대 회동설’을 제기하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자 김병기는 “처음 거론한 분이 해명하라”고 했다. 원내대표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인사를 직접 비난한 것이다. 이 인사와는 쿠팡 임원 식사 문자 노출로 “공작 정치”라는 말까지 오가며 충돌했다.

집권 초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 공격이 아니라 내부 분열인지 견제인지 애매한 무언가로 무너졌다. 개인 문제로 벼랑 끝에 몰린 순간, 그의 녹취가 공개돼 당의 공천 뒷돈 문제가 터지며 상황이 급변했다. 김건희를 공격할 때 사용했던 ‘매관매직’의 칼이 민주당의 목을 겨누고 있다. 통화도 아닌 의원 간 대화를 녹음한 김병기 취향은 괴이하다. 강선우 급과의 대화를 저런 선명한 음질로 녹음했다면 그의 녹음은 일상적이라고 봐야 한다. 왜 녹음했고, 누가 보유하다가 공개했는지 아직 추측의 영역이다. 그러나 총선 때의 ‘비명횡사’가 됐든, 권력 내부 이야기가 됐든 김병기와 은밀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기겁해 잠을 설치고 있을 것만은 분명하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녹음 관련 거짓말로 물러났다. 워터게이트 1년 뒤 상원 청문회에서 닉슨이 집무실에서 나눈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닉슨은 녹취를 은폐하려 했다. 사건 22개월 뒤에야 녹취 일부를 공개했지만, 이 또한 은폐 조작됐다. 지지층까지 등을 돌렸고 대법원은 녹취의 전면 공개를 명령했다. 닉슨의 녹취 습관이 자기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닉슨 측근은 “닉슨은 자기 말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김병기까지 자기 말을 후세에 남기려 했을 리는 없겠고, 왜 자기 대화를 녹음했고 왜 지금 누군가는 이를 공개했을까. ‘김병기 녹취록’은 김병기 너머의 목표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 신호다. 김병기는 추가 녹취에 대해 “결단코 더 이상은 없다”고 했지만, 왜 강선우 것만 녹음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에선 “녹취가 쌓여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더 신뢰를 얻고 있다. 김병기와 사선을 넘나들며 많은 것을 공유했던 인사는 이제 김병기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기 어렵게 됐다. 지금부터 강선우가 아닌 김병기 신병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우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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