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부터 남자 주인공역 백인 배우가 연기
일각 “작품의 아시아 대표성 훼손”
일각 “작품의 아시아 대표성 훼손”
지난 6월 8일(현지 시각)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시상식에서 올해 최다 수상인 6관왕이 된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게티이미지코리아 |
지난 6월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올해 최다인 6관왕을 휩쓸며 K뮤지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남자 주인공 캐스팅(배우 선정)과 관련한 논란에 휩싸였다. 아시아계 배우가 맡았던 이 배역을 다음 달부터 백인 배우가 맡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시아계 배우들과 일부 평론가 사이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상징성이 퇴색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로봇에게 인종이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연출·극본·음악·무대디자인상과 남우주연상 등 뮤지컬 주요 부문 트로피를 휩쓸었다. 이 작품은 한국 작사가·극작가 박천휴와 미국 작곡가 윌 애런슨이 공동 창작해 2016년 서울 대학로에서 초연한 토종 한국 뮤지컬로, 우리 뮤지컬이 세계 공연의 메카 뉴욕에서 기적을 썼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인간을 돕도록 만든 구형 로봇 클레어와 올리버가 교감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서울과 제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등 작품 곳곳에 한국적 요소가 가득하다.
토니상 6관왕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남녀 주연 배우 대런 크리스(왼쪽·남우주연상 수상)와 헬렌 J 셴./사진가 매슈 머피, 에번 짐머먼 |
◇아시아계 “백인 배우로 교체, 실망”
논란은 최근 제작진이 “대런 크리스가 연기했던 주인공 ‘올리버’를 9월부터 9주 동안 앤드루 바스 펠드먼이 맡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토니상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은 대런 크리스는 한 차례 계약을 연장한 끝에 8월까지 무대에 설 예정이며 그 뒤를 펠드먼이 이어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들 사이에서 비판이 나왔다. 이 뮤지컬은 아시아(한국)를 배경으로 하고 지금까지 배우들도 아시아계였는데 남자 주인공을 아시아계가 아닌 백인으로 교체한 점은 이 작품이 가진 ‘아시아 대표성’을 고려하지 않는 결정이라는 것이다. 현재 공연에 출연 중인 8명의 배우(대체 배우 4명 포함) 중 7명은 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 또는 태평양 제도 출신이다. 현재 주연 배우 크리스도 필리핀계다. ‘아시아계 미국인 공연예술인 행동 연합’은 성명을 내고 “그동안 자주 배제되어 온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줄어드는 다른 선례가 생겼다”면서 “이번 결정에 매우 실망했다”고 했다. 영화 쥬라기 공원 등에서 연기한 유명 아시아계 배우 BD 웡은 “가볍게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겠지만 이번 일은 아시아계 배우들과 관객에게 뺨을 때리는 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유명 아시아계 배우 콘라드 리카모라는 “배우를 꿈꾸는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을 위한 장학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어쩌면 해피엔딩' 제작진이 7월 31일 올린 입장문/인스타그램 |
◇제작진 “아시아계 배우만 맡으라는 법 없어”
논란이 거세지자 ‘어쩌면 해피엔딩’을 함께 만들어 낸 작가 윌 애런슨(44)과 박천휴(42)는 소셜미디어에 공식 입장문을 냈다. 이들은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공동체 소속 배우들에게 뮤지컬 출연진 구성이 얼마나 의미 있는 부분인지 이해하고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이번 결정이 그들이 경험한 상처를 다시 열게 했다는 점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꿈은 처음부터 이 우화적인 로봇 이야기를 누구든지, 어디에서든 편안하게 공연할 수 있으면서도 그 배경은 분명히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면서 “모든 역할을 아시아계 배우가 연기할 수 있도록 작품을 쓰고자 했지만 로봇 역할에 항상 그렇게 캐스팅되어야 한다는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제작진은 ‘우리가 말하는 건 로봇들이며 이들에게 인종이라는 개념이 있긴 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같은 날 뮤지컬 여자 주인공(클레어)을 맡은 헬렌 J 션도 입장을 올렸다. 논란의 중심에 선 배우 펠드먼과 션은 실제 연인이기도 하다. 아시아계인 션은 “내가 어렸다면 토니상 시상식에서 우리 공연을 보는 순간이 희망의 등불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그런 꿈과 기대를 공동체에서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 슬프다”고 했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 그 역할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 사람과 무대에 설 기회는 엄청난 기쁨”이라고 했다.
9월부터 '올리버' 역을 맡을 예정인 앤드루 바스 펠드먼/'어쩌면 해피엔딩' 인스타그램 |
◇“독창적 성격이 최대 강점이었는데…”
이번 논란은 단순히 배우의 인종이 무엇인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로 기존 브로드웨이 성공 공식을 따르지 않은 독창성이 꼽힌다. 일반적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고 하면 오랜 기간 잘 알려진 곡을 바탕으로 수많은 출연진이 무대를 가득 채워 규모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특히 백인 배우가 무대에서 주요 배역을 소화하고 있는 현실도 그대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관객들이 처음 들어보는 곡과 배경이 등장하고 출연 배우도 4명에 그치는 등 기존 성공 공식을 완전히 뒤엎은 참신한 발상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WP 평론가 나빈 쿠마르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품질과 독창성이 브로드웨이에서 여전히 통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면서도 “이번 캐스팅은 중대한 실수이며 반발이 터져 나오는 것은 정당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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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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