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삶이 벙커에 빠져도… 포기 마세요, 기회는 옵니다

조선일보 이태동 기자
원문보기

삶이 벙커에 빠져도… 포기 마세요, 기회는 옵니다

서울맑음 / -3.9 °
LPGA 메이저 놀라운 역전 우승
호주 교포 그레이스 김 인터뷰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더라고요.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야 하는 이유를 제가 연장전에서 보여줬잖아요.”

미국 LPGA(여자프로골프) 투어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기적 같은 역전 우승을 차지한 호주 교포 그레이스 김(25)은 “꼭 골프가 아니더라도 슬럼프를 겪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랭킹 99위였던 그는 지난 13일 에비앙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 18번 홀에서 이글(4라운드)-칩인 버디(1차 연장)-이글(2차 연장)을 기록하며 세계 2위 지노 티띠꾼(22·태국)을 꺾었다.

그레이스 김이 지난 13일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 4라운드 12번홀에서 벙커샷을 하고 있다. 그는 이 홀에서 더블보기를 했지만, 15·16번홀 연속 버디와 18번홀 기적 같은 이글로 연장에 들어갔다. 2차 연장 끝에 우승한 그는 “경기 막판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기하면 안 된다’고 계속 생각했고, 마지막 홀에서 진짜 좋은 샷이 나왔다”고 했다./게티이미지코리아

그레이스 김이 지난 13일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 4라운드 12번홀에서 벙커샷을 하고 있다. 그는 이 홀에서 더블보기를 했지만, 15·16번홀 연속 버디와 18번홀 기적 같은 이글로 연장에 들어갔다. 2차 연장 끝에 우승한 그는 “경기 막판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기하면 안 된다’고 계속 생각했고, 마지막 홀에서 진짜 좋은 샷이 나왔다”고 했다./게티이미지코리아


24일 개막하는 ISPS한다위민스 스코티시오픈 출전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있는 그레이스 김과의 인터뷰는 지난 20일 영어로 진행됐다. 그는 “어릴 때 토요일마다 한글학교에 다녀서 부모님과는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지만, 내 한국말은 사실 ‘콩글리시’ 같다”며 웃었다.

그레이스 김은 에비앙 챔피언십 최종일 18번홀(파5·455야드)에서 4라운드 마지막 홀과 연장 1·2차전 경기를 치렀다. 세 번의 세컨드샷 모두 홀까지 190야드 정도를 남겨놓고 4번 하이브리드 클럽을 잡았다. 그는 “공이 발보다 아래에 있는 경사여서 볼을 치면 오른쪽으로 휘는 구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5번 아이언으로 치면 그린에 못 오르거나 오른쪽 미스샷이 나올 것 같아 4번 하이브리드로 (왼쪽을 보고) 페이드 구질을 구사했다”고 말했다. 페이드(fade)는 공이 왼쪽으로 출발해 살짝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구질이다. 그는 평소에는 스핀양이 상대적으로 적어 거리가 더 많이 나는 드로(draw·오른쪽으로 출발해 왼쪽으로 휘어짐) 구질을 선호한다고 했다.

4라운드 18번홀 세컨드샷은 핀을 지나쳤지만, 그린 경사를 타고 거꾸로 굴러 내려와 홀 옆 30㎝에 붙었다. 여기서 나온 이글로 2타 차이를 따라잡고 티띠꾼을 연장으로 끌고 갔다. 그는 “핀 뒤쪽 경사를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고, 의도한 대로 샷이 됐다”며 “캐디의 조언을 들었고, 팀워크가 좋았다”고 했다.

한복 입고 경복궁 나들이 그레이스 김이 작년 10월 서울 나들이 때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찍은 사진. 그는 “한복은 정말로 예쁘다”고 했다./그레이스 김 제공

한복 입고 경복궁 나들이 그레이스 김이 작년 10월 서울 나들이 때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찍은 사진. 그는 “한복은 정말로 예쁘다”고 했다./그레이스 김 제공


연장 1차전에서 세컨드샷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 도로를 맞고 물에 빠진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는 벌타를 받고도 차분히 웨지로 4번째 샷을 홀에 그대로 집어넣어 기사회생했다. “당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건 에너지를 낭비해 손해가 될 뿐”이라며 “화가 나도 곱씹지 않고 금방 털어버린다”고 했다.


그레이스 김은 호주 시드니 근교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호주 매체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한국에서 호주로 건너가 소규모 청소 업체를 운영했고, 집안 사정은 넉넉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2023년 4월 LPGA 투어 첫 우승(롯데 챔피언십)을 달성한 뒤 “직접 돈을 벌어 부모님을 편안히 모실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골프는 운동을 시키려는 아버지 권유로 열 살 때 시작했다. 처음 2년간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12세 때부터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면서 점차 즐기게 됐다. 2017년 호주 주니어 여자 대회를 시작으로 아마추어 대회를 연거푸 우승하며 유망주로 떠올랐다.

롤 모델은 LPGA 투어 통산 41승을 올린 호주 레전드 카리 웹(51)이다. 그레이스 김은 웹이 호주의 골프 유망주 지원을 위해 만든 ‘카리 웹 시리즈 장학생’에 네 차례 선발됐다. 장학생 자격으로 웹과 메이저 대회 현장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조언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웹은 에비앙 챔피언십 당시 그레이스 김이 경쟁자 티띠꾼과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 “‘저렇게 하지 말고 (우승을 위해) 좀 못되게 굴 필요가 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레이스 김은 “가족들과 한국 관광도 자주 한다”고 말했다. “작년 가을 서울에 있는 경복궁에 갔는데 한국 전통문화, 특히 한복이 정말 예뻐서 반했다”고 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한국 스킨 케어 화장품을 여행 가방에 잔뜩 넣어 돌아간다고 한다.


그레이스 김은 경기 때마다 모자에 노란 오리 모양 핀을 달고 나선다. 호주 한 단체가 암 투병 중인 어린이를 돕기 위해 만든 캐릭터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뛰다가 2018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호주 골퍼 재러드 라일이 경기 때마다 이 핀을 달았는데 그레이스 김이 이어받았다. 그는 “박세리나 웹처럼 골프계의 엄청난 ‘전설’이 되는 것도 좋지만, 인생의 목표는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에비앙 챔피언십을 치르면서 한국 팬들로부터 응원을 많이 받았다”며 “앞으로도 명장면이 많이 나올 테니 지켜봐 달라”고 했다.

[이태동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