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젤과 취리히에서 만난 스위스 미술관의 ‘삼대장’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짧았지만 스위스 여행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민들의 다수가 호수변에 사는 취리히 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도 정말 부러워보였고요. 폭염이 찾아온 유럽의 날씨도 뜨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오늘의 사진들은 제법 초록초록합니다.
자연 속의 미술관 바이엘러 재단. ©김슬기 |
바젤 도심에서 10여분만 트램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이 나타납니다. 놀랍게도 바젤을 벗어나자마자 창밖으로는 농장과 광활한 자연이 펼쳐지더군요. 자연을 사랑하는 스위스인들의 소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미술관의 앞뜰에서는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농장이 보이더군요. 그야말로 자연을 품은 미술관입니다.
정원에는 칼더의 조각과 함께 한 여름인데도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네의 수련을 보는 듯한 작은 연못을 미술관 정면에 만들어놓아 전시장에서는 건물 밖의 푸르른 정원과 물그림자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자연 속에 있는 덕분에 사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아트 바젤이 열리는 6월이면 울긋불긋하게 양귀비꽃이 핍니다.
1997년 이 미술관의 탄생에는 두 남자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갤러리스트로 평가받는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1921~2010)와 퐁피두 센터를 지은 건축거장 렌조 피아노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지 않나요? 아트 바젤의 창립자 중 하나가 바이엘러입니다.
이 미술관은 정말 외관부터 특별합니다. 겉에서는 이 미술관은 단층 주택처럼 보입니다. 2층 중 저층을 땅 속에 묻어두었거든요. 이처럼 과시하지 않고 소박하게 자신의 담고 있는 예술을 빛내주는 미술관은 보기 드뭅니다. 이 미술관만큼 잘 지어진 사립 미술관이 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이 컬렉터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최고의 유산이 이 미술관입니다. 한 사람이 바젤이라는 도시를 영원히 바꾸는 유산을 두 개나 남긴 셈입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가들 중에 바이엘러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겁니다. 덕분에 바이엘러 재단의 400여점의 컬렉션은 20~21세기 걸작을 방대하게 보유한 걸로 무척 유명합니다.
바이엘러 재단의 헉소리가 나는 피카소 컬렉션 ©김슬기 |
미술관이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소장품 상설전시는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대작으로 시작해 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등 20세기 대표 작가의 최고 수준의 작품이 펼쳐집니다.
시대를 초월해 마크 브래드포드와 디지털 페인팅 작가 웨이드 가이턴 같은 생존 작가의 작품도 걸려 있었죠.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매우 낯선 영상 신작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의 피카소 컬렉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는 여인>과 <할리퀸>을 비롯해 각 시대별 대표작이 한자리에 모인 압도적인 수준입니다.
바이엘러 재단의 6월 전시는 언제나 큰 관심을 모읍니다. 최고의 아트페어 기간 이 도시를 찾는 미술계 ‘인싸’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전시는 그 파급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2022년에는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자신의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여백이 있고 명상적인 비야 셀민스의 전시. 뒤편의 검은 그림이 별빛을 그린 회화 작품이다. ©김슬기 |
비야 셀민스(Vija Celmins, 9월 21일까지)는 사실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1938년생 라트비아 리가 태생의 미국 작가와의 첫 만남은 기억할만한 경험을 안겨줬습니다. 셀민스는 포토 리얼리스트로 불립니다. 사진처럼 정교하게 대상을 그리거든요.
처음에는 유년기 독일과 라트비아의 난민 캠프를 전전할 때 밤하늘을 뒤덮었던 폭격기와 같은 기억 속 재난과 전쟁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LA에서 외롭게 공부할 때 친구나 다름없던 조명등과 편지와 같은 일상적인 사물에도 초점을 맞췄죠. 포커스가 맞지 않는 사진처럼 흐릿한 초기작은 첫 눈에도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장한 지역과 연령대가 비슷하기 때문일까요.
긴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거미줄, 바다, 사막의 표면 구조로 눈을 돌렸고, 나중에는 밤하늘과 은하계를 더 구체적으로 관찰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혼 후에는 매일 밤바다를 산책했는데 여기서 평생의 숙제를 발견합니다. 그는 여전히 출렁이는 밤바다를 연필을 사용해 촘촘하게 그려내고, 칠흑처럼 어두 밤의 별빛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루한 반복을 통해 완성되는 이 작품들은 명상적이기까지 합니다.
전시의 마지막 방에서 상영되는 40여분짜리 영화는 뉴욕 인근 시골 마을의 별이 잘 보이는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의 일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고양이 레이먼드와 함께 살며, 그림 소재를 찾기 위해 밤이면 별을 보러 집밖으로 뛰쳐나가는 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죠.
여전히 빠른 속도로 운전을 하고 농담을 즐겨하는 귀여운 할머니 작가는 연로한 나이에도 성실한 노동으로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자연의 새로운 면모를 포착해냅니다. 재료도, 소재도 평범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의 그림은 피상적인 시선에 저항합니다. 관찰자가 온 마음을 다해 들여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친밀하면서도, 낯선 자연의 아름다움입니다.
대표작인 바다를 그린 작품. 연필로 그린 묘사가 정말 섬세하다. ©김슬기 |
바젤 미술관 안뜰에는 로댕의 유명한 조각인 칼레의 시민들이 있다. ©김슬기 |
본관 맞은 편에 있는 바젤 미술관 노이바우. ©Kunstmuseum Basel |
바젤을 대표하는 바젤 미술관(Kunsthalle Basel)은 중세 후기부터 현재까지 8세기에 걸쳐 30만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바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16세기부터 공공 컬렉션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상인들이 이끄는 작은 도시 공화국 바젤은 중립국인 스위스의 역사가 말해주듯 지정학의 재앙을 피해 부를 보호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의 지속적인 유입도 컬렉션을 튼튼하게 했습니다. 바젤은 16세기 이후 활발한 자선활동의 전통이 탄탄해 정말 많은 기부가 이루어졌습니다. 한스와 장 아르프, 파블로 피카소, 재스퍼 존스, 프랭크 스텔라 등 예술가도 기부를 했습니다. 도시 규모에 비해 놀라운 컬렉션을 보유한 도시가 된 비결입니다.
미술관은 세 개의 건물로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각각 고전 회화, 현대, 특별 전시를 담당하고 있죠. 1980년 현대미술을 위한 공간 게겐바르츠쿤스트(Museum für Gegenwartskunst)가 완공됩니다. 엠마누엘 호프만 재단과 설립자 마야 자허-슈텔린과 그녀의 가족이 크리스토프 메리안 재단에 공동으로 건물을 지어 기부했습니다.
특별 전시를 여는 본관 맞은편의 노이바우(Neubau)도 2016년 샤울 라거를 운영하는 로렌츠 재단이 무려 5000만 스위스 프랑을 기부하면서 완공됐죠. 바젤은 기부가 만들어낸 예술 도시입니다.
아트 바젤 기간에는 본관과 노이바우에서만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젤에 도착한 첫날은 비공개 행사를 위해서 넓은 안뜰을 가진 ㅁ자 모양의 본관은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며칠 뒤, 밤늦게 미술관을 지날 때는 이 안뜰에서 화려한 만찬 행사가 열리고 있더군요. 말그대로 바젤의 낮과 밤을 모두 밝히고 있는 미술관이었습니다.
Hans Holbein the Younger [The Dead Christ in the Tomb], 1521–1522. ©Kunstmuseum Basel |
바젤 미술관 본관은 스위스 미술의 계보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고전 회화 미술관입니다. 이 곳의 가장 중요한 작가는 독일인임에도 16세기 초에 바젤에서 장기간 살았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입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외교관>으로 유명한 그는 이 미술관에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젤 대학 교수이자 변호사였던 바실리우스 아메르바흐의 막대한 컬렉션이 바젤시에 의해 인수되면서 15점에 달하는 홀바인의 작품을 미술관이 소장하게 됐습니다.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를 비롯해, <예술가의 가족 초상화>, <수난 제단화> 등 희귀작을 대거 만날 수 있죠.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는 16세기 작품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입니다. 수척하게 마른 예수는 머리와 수염이 산발을 한 모습으로,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습니다. 정말로 관 속을 들어가 보는 것 같은 시신의 묘사가 생생합니다. 그 어떤 신에 대한 외경심조차 보이지 않죠. 비참하게 죽은 인간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바젤 미술관을 방문했던 도스토옙스키는 그림을 보는 순간 말을 잃고, 의자에 올라서서 한참을 그림을 볼 만큼 충격을 받았습니다. “홀바인은 놀라운 예술가이자 시인”이라는 찬사를 남겼을 정도입니다.
19세기 컬렉션에서는 부자 도시 바젤의 재력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반 고흐, 폴 고갱, 에드가 드가를 비롯한 인상파 걸작들이 빼곡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나야 할 가장 중요한 컬렉션은 바로 스위스 국민 화가들입니다.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알베르트 앙커(Albert Anker), 페르디낭 호들러(Ferdinand Hodler) 등 스위스 회화의 거장들의 주요 작품을 만날 수 있거든요.
Arnold Böcklin [Play of the Nereides], 1886 ©Kunstmuseum Basel |
이 중에서도 바젤에서 태어난 국민 화가가 뵈클린입니다. 베를린에서 소개했던 뵈클린의 <죽음의 섬>의 첫 번째 버전인 1880년작을 볼 수 있는 곳도 이곳입니다. 뵈클린은 신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고전적 소재를 그리면서도 이 스위스 작가의 화풍은 상징주의적 입니다. 낯설고 환상적인 묘사 속에서도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지는 건 단연 ‘죽음’입니다. 죽음의 알레고리야말로 이 화가를 이해하는 열쇠말입니다.
바젤 미술관과 인연이 있는 또 한 명의 거장은 피카소입니다. 미 미술관에 수년간 전시되어 있던 두 대표작 <두 형제>(1906)와 <앉아 있는 할리퀸>(1923)의 소유주가 매각 가능성을 알렸을 때, 바젤 시민들은 240만 스위스 프랑을 기부받아 그림을 매입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사연을 들게 된 피카소는 바젤에 4점의 작품을 추가로 기증했죠.
20세기 후반 미술의 걸작들을 상설전으로 전시하고 있는 노이바우(Neubau)는 지하를 통해 본관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별전시가 수준이 높기로 유명하죠. 이번에는 아쉽게도 빈에서 이미 관람한 메다르도 로쏘의 특별전 <현대 조각의 발명>(8월 10일까지)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방대한 공간을 활용해 나름의 변주를 하고 있더군요. 친구인 로댕만큼의 평가를 당대에는 받지 못했지만, 그의 모호하고 시적인 조각이 21세기에 주목받는 걸 보면서 예술가의 운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Pablo Picasso [Seated Harlequin], 1923 ©Kunstmuseum Basel |
Oskar Kokoschka [The Wind’ s Bride (The Tempest)], 1913 ©Kunstmuseum Basel |
스위스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할애하는 공간과 컬렉션의 규모로만 볼 때는 스위스 미술의 삼대장은 호들러, 뵈클린, 자코메티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젤 미술관에서 이들 못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작가는 오스카 코코슈카입니다.
<바람의 신부>(1913~1914)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1912년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아내인 알마 말러(Alma Mahler)를 만나 열정적 사랑에 빠진 그가 자신의 곁에 누운 알마 말러를 그린 작품이죠. 잠에서 깨어 허공을 응시하는 코코슈카 옆에서 평화로운 잠에 빠진 알마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914년 알마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하면서 두 사람은 결별했고, 이 사건은 코코슈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죠. 폭풍우와 소용돌이치는 배경, 조개껍질 같은 요람 등은 사랑의 불안정함과 곧 닥칠 이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별을 예감한 듯 허망한 코코슈카의 표정이 눈에 밟힙니다. 역동적인 붓질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그린 표현주의의 걸작은 작가에게는 ‘영혼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이별의 불안과 절망, 심지어 집착의 감정까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취리히 미술관의 치퍼필드관 ©김슬기 |
취리히 미술관은 건물부터, 컬렉션까지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을 선사해준 미술관입니다. 고전부터 21세기 미술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걸작이 가득한 엄청난 상설전시의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동시대 미술 특별전도 야심만만한 규모였습니다. 특히 몰입형 전시와 디지털 아트에 이렇게 적극적인 현대 미술관도 보기 드물겁니다. 한 미술관이 이토록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는 건 정말 오랜만의 만남인 것 같습니다.
비결이 있습니다. 바젤과 마찬가지로 예술애호가들의 열정과 기부였습니다. 취리히 미술관은 애초에 왕궁 컬렉션이 아닌 소규모의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 그룹을 통해서 시작됐습니다. 1787년에 설립된 예술가협회(Künstlergesellschaft)는 1794년부터 미술 작품을 수집해 전시를 열었습니다. 기부된 미술품을 소장하는 미술관을 1840년대부터 갖게 됐고, 1917년 페르디낭 호들러의 전시를 계기로 취리히 예술친구들 협회(Vereinigung Zürcher Kunstfreunde)가 설립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바젤의 샤울라거를 비롯해서 스위스에서 가장 존재감이 뚜렷한 건축가는 헤르조크&드 뫼롱입니다. 하지만 취리히에선 아닙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이 놀라운 미술관에서도 아모레퍼시픽 사옥과 흡사한 외관 마감과 65미터의 정사각형 평면까지 익숙한 건축 마감을 보여줍니다. 2021년 완공된 이 건물로 취리히 미술관은 네 차례의 증축을 거 스위스 최대 미술관이 됐습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는 두 개의 건물을 쓰고 있는 이 미술관은 겉보기와는 달리 어찌나 방대한 컬렉션과 전시를 꽁꽁 숨겨놓았던지, 이 곳에서만 반나절을 꼬박 쓰고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특별전만 마르셀 뒤샹의 누이인 수잔 뒤샹, 로비에서 전시 중인 제프리 깁슨, 몬스터 체트윈드, 로만 지그너까지 네 개의 기획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습니다.
치퍼필드관에 들어서자 마자 1972년생 미국 원주민 작가로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전시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제프리 깁슨의 거대한 설치 작품이 로비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차 없이 동시대 미술과 소통하는 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었죠.
나치 몰수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은 기부를 통해 이 미술관의 얼굴이 됐다. Pierre-Auguste Renoir [Irene Cahen d‘Anvers], 1880 ©김슬기 |
치퍼필드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질문’입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르누아르의 <이렌느 깡 단베르의 초상>(1880)는 작가의 가장 훌륭한 초상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 걸작입니다. 초상화의 주인공 소녀의 부모는 집에 그림을 걸어두고 감상했죠.
세월이 흘러 이 소녀가 낳은 딸은 가족과 함께 나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통과 상실과 애도가 모두 담긴 비극적인 작품인 셈입니다. 스위스 사업가 에밀 뷔를레는 전쟁으로 큰 돈을 번 무기 제조업자이자 미술품 수집가로 1949년 이 그림을 구입했습니다. 전후 나치 약탈품은 주인에게 돌려줘야했지만 이미 주인이 사라진 많은 그림들은 부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뷔를레가 기부를 하면서, 이 그림은 공공 미술관에서 모두가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됐죠.
취리히 미술관은 전쟁에서 돈을 벌어 논란이 된 많은 부호들의 기증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미술관입니다. 미술관은 이 뷔를레 컬렉션을 비롯해 기부된 작품의 소장 과정을 고스란히 공개하면서 기증 미술품의 소유와 보존, 그리고 감상의 권리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심지어 소유 논란이 있는 폴 고갱, 툴루즈 로트렉, 반 고흐, 클로드 모네의 그림 5점은 액자를 철수한 채 빈 공간만을 전시합니다.
에밀 뷔를레 컬렉션의 인상주의 외에도 가브리엘레와 베르너 메르츠바허 컬렉션의 야수파 및 표현주의 작품, 휴버트 루저 컬렉션의 미국 추상화 등 취리히 미술관의 많은 걸작들이 기부를 통해 미술관의 소유가 됐습니다. 미술관에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두었습니다.
페르디낭 호들러 벽화 [무한을 향한 시선] ©김슬기 |
치퍼필드관에서 가장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두 작가는 페르디낭 호들러와 조반니 사간티니입니다. 호들러는 바젤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도 초대형 벽화를 두 점이나 그렸습니다. 여러 여인과의 미친듯한 사랑을 하면서 죽음과 사랑을 주제로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던 화가입니다.
스위스 대표 화가답게 알프스의 풍광을 반복해 그렸던 그는 대규모 군상이 등장하는 벽화도 여러점 남겼죠. 바젤 미술관과 취리히 미술관의 벽에 그려진 동일한 도상의 <무한을 향한 시선> 속 여인들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과는 달리 반복적인 몸짓을 통해 초월적인 감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와 나란히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간티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일생을 알프스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헌신했습니다. 스위스에서 만난 알프스의 풍경을 그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어김없이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전시장에 누워서 피필로티 리스트의 [Turicum Pixelwald]를 감상하고 있는 관객들. ©Kunsthaus Zürich |
치퍼필드관 최고의 인기 장소는 어두컴컴한 방입니다. 스위스 예술가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투리쿰 픽셀발트(Turicum Pixelwald)>(2021)는 21세기 관람객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줍니다. 3,000개의 LED 조명이 6곡의 몽환적인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듯 빛을 발하는 방은 말그대로 오감을 모두 사용해 미술을 만나는 곳입니다. 바닥에 눕거나 벽에 기댄 체 한참을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복도에 별도의 방이 마련된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작품도 인기가 많습니다. 작은 방에 기증을 받아 2026년까지 전시될 예정인 는 1억 개 이상의 이미지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남극의 빙하를 담은 1,000만 개 이상의 시각 자료를 데이터로 사용해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낸 영상입니다. 쉽게 녹아서 사라지는 빙하의 연약함은 매혹적인 이미지로 변주됩니다.
Refik Anadol [Glacier Dreams] ©Kunsthaus Zürich |
본관의 기능을 하는 모저관에서는 상설 전시와 특별 전시가 모두 열립니다. 상설 전시에서는 스위스 국민 작가들의 엄청난 컬렉션을 끝없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자코메티, 알버트 앙커, 하인리히 퓌슬리, 아르놀트 뵈클린, 펠릭스 발로통은 취리히 미술관이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스위스 미술을 만나려면 취리히에 직접 와야하는 이유입니다.
이 작가들을 만나면서 이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토록 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쏟아졌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알프스와 호수를 거닐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자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요. 발로통의 묘한 색감과 인물화의 구도를 보면서는, 그의 영향을 받은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그림이 연상되어 흥미로웠습니다.
여기가 노르웨이인가 싶을 정도로 에드바르 뭉크의 많은 초상화가 걸려있고, 독일 표현주의 거장 게오르그 바첼리츠의 초기작도 여러 점 있어 반가웠습니다. 특히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 수십 점이 영구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후 인류의 비극의 화폭에 표현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삼면화와 나란히 전시된 자코메티의 성마른 조각들은 묘한 울림을 주더군요.
Albert Anker [Two Girls on the Stove Bench], 1895 ©Kunsthaus Zürich |
자코메티의 조각과 초상화 ©김슬기 |
런던에 살면서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를 찾아가 미술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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