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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 소설가 김애란이 말하는 ‘이웃’이란?

조선일보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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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 소설가 김애란이 말하는 ‘이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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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장(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무심코 놓치고 지나간 신간, 인터뷰에 담지 않은 후일담, 각종 취재기 등 이모저모. +α를 곁들여 봅니다.

신간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문학동네)를 낸 소설가 김애란(45)을 지난 3일 만났습니다. 작년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이후 두 번째 만남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이웃 사랑’으로 주제를 잡고 진행했는데요. 단편 ‘좋은 이웃’을 인상 깊게 읽었고, 나머지 여섯 편의 단편도 ‘이웃에 대한 태도’를 고민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오후 인터뷰를 마친 뒤엔 다음 날 지면에 싣기 위해 곧바로 후다닥 기사를 마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짧고 굵게 ‘안녕이라 그랬어’가 다녀간 기분입니다. 뉴스레터를 위해 지난 인터뷰를 복기하면서, 저도 소설가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느긋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주요 질문과 답변을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주의: 단편 ‘좋은 이웃’에 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황지윤 기자(이하 황):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김애란 소설가(이하 김): 이제 막 책이 나와서 주위에 책 알리는 시간을 갖고 있고요. 독자분들도 뵙고, 이어지는 행사 자리도 몇 개 있습니다. 그리고 단편 작업도 병행하고 있어요.

황: 홍보하면서 단편 작업을 병행할 수 있으세요?


김: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웃음).

황: 빠르게 작품 이야기를 해보려 하는데요. 첫 단편인 ‘홈파티’부터요. 이런 상황 묘사, 이런 핍진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김애란은 어디서 재료를 수집하나요?

김: 실제로 어떤 모델을 쓰는 경우는 드문 편이어서, 가족 서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물을 상상으로 만들었어요. 공간도 여러 정보와 상상을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연극 무대처럼 조금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긴장, 큰 사건 없이도 그 안에 관계나 위치의 차이로 발생하는 에너지, 그런 대사를 단편 안에서 쓰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데뷔작도 그랬고요. 특히 코로나 시기에 그 관계가 실내로 많이 들어오면서, 경제적 환경도 달라지고…. 그걸 그릇 하나에 담아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황: 어느 소설가가 어느 가든 파티에 초대받은 후에 파티 참석자를 화자로 소설을 썼는데, 나중에 그 파티의 주최자가 그걸 보고 ‘다시는 소설가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아야겠다’ 노발대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홈파티’는 항의 받을 건덕지는 없나요?

김: 예, 거의 없고요. 저는 창작자이기도 하고, 생활인이기도 하고, 자연인이기도 하잖아요. 완벽하게 분리는 안 돼도 저의 삶도, 제 삶의 자리도 있기 때문에 그걸 남겨두려고 해요. 관찰자, 수집가로 매 자리에 있으면 제 자신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어요. 번번이 직업인으로서의 단추가 눌려지지는 않습니다.

황: 거리두기나 단추를 누르지 않는 법, 오랜 시간을 거치며 터득한 건가요?


김: 내가 나의 삶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생각들, 깨달음들이 시간과 몸을 통과해 사후적으로 오는데요. 그런 걸 작품 안에 넣는 걸 좋아해요.

황: 저는 ‘좋은 이웃’이 표제작감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이번 책을 ‘이웃 사랑에 무한히 실패하는 현대인의 초상’ 모음집 같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어떤 물리적인 이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타자로서의 어떤 이웃. 그리고 그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지독하게 고민한 결과물이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김: 거창하게 넓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냥 나의 안녕과 이웃의 안녕이 같이 가면 가장 좋고, 때때로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들이 이웃 같아요. 경제적 어려움을 다루는 소설은 한국 현대 문학사에 많았잖아요. 선배들도 다른 방식으로 변주해오셨는데, 몇 년새 상황은 비슷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해석 혹은 전망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 화자의 독백처럼, 반드시 내가 무언가를 못 가져서가 아니라, 충분히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린 가치나 믿음의 상실이 드러나길 바랐어요.

황: 경제적 어려움을 다루는 소설이 한국 현대 문학사에 있었고, 그것이 변주돼 왔는데 몇 년 사이에 해석이나 전망이 달라졌다 말씀하셨잖아요. 어떤 의미인가요?

김: 일단 한국은 식민지, 전쟁까지 겪어서 말 그대로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중요하고 생존에 대한 욕구나 불안도 크고요. 그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 부모님 세대의 생존, 먹고사는 일, 그 안에서의 치열함과 비루함을 다룬, 동시에 긍지도 있었던…. 산업화·근대화 시대부터 쭉 이어져온 근면함에 대한 일반 직장인들, 노동자들의 자긍심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는 감각도,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먹는가. 그리고 노동 가치와 금융 소득 가치가 역전되면서 근면함과 성실함에 대한 자긍심이 손상됐고, 회의가 생긴 것 같아요. 한국 사회의 경쟁이 심하다고 하는데, 이건 한편으로 계급 이동의 역동성이 주는 다른 면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도 지금 흐려지고, 고정돼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황: ‘좋은 이웃’에서 묵직한 울림을 주는 부분이 화자의 남편이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버리는 장면인데요. 방금 말씀하신 맥락과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걸 버리는 장면이 되게 상징적이라 느껴졌고, 이 장면은 약간 발칙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웃음). 어떠세요?

김: 앞서 말씀드린 선배 세대의 텍스트를 의식하면서 쓰고 싶기도 했어요. 이어 쓰기의 방식으로. 그래서 한 문장을 인용했는데, 한편으로는 제가 허허벌판에서 동시대를 그리는 게 아니라 기댈 언덕이 있구나, 비빌 언덕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책을 버리는 행위로 자기가 믿어왔던 가치나 신념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성인은 어느 시기마다 한 번씩 그런 과정을 겪는 것 같아요.

황: 자기에게 중요하게 생각되어 왔던 가치가 흐려지거나 내가 그걸 버리는 순간이요?

김: 예 그렇죠. 그럴 때 질문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황: ‘좋은 이웃’과 ‘안녕이라 그랬어’가 표제작에서 경합을 했던 걸로 아는데요.

김: ‘이웃’이란 말도 넓은 단어고, 소박하면서도 오래된 말이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온도가 달라진 말이라 일곱 편의 단편을 묶어줄 수 있는 단어가 되지 않을까 했거요. ‘안녕’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넓은 말이라. 제 소설 속 인물의 안부, 우리 독자분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편집부와 다른 분들 의견을 같이 모아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출판사에서도 각각 제목을 지지하는 분들의 숫자가 비슷했어요. 그러다 ‘좋은’이라는 말이 자칫 이분법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고, 문학은 그런 게 아니니까 더 넓은 단어를 쓰기로 했죠.

황: 책의 몇 구절을 같이 읽어보고 싶은데요. 아까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 이런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맥락과도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귀족적 천진함이 있었다. 남으면 버리고, 없으면 사고, 늦으면 택시를 타는 식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진 무심한 순진함이” (‘숲속 작은 집’, 58쪽)

“내 속의 중요한 무언가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것을 지금 내 옆의 사람과 결코 나눌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좋은 이웃’, 137쪽)



바로 옆에 있다는 점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도 어떻게 보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가장 가까운 이웃도 온전히 사랑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이웃을 사랑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요?

김: 아마 우리 대부분이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또 여러 위치나 욕망, 정체성을 갖고 있죠. 그 안에서 어떤 차이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좋은 이웃’이라고 중의적인 의미로 제목을 달았고, 의인이라든가 성인이라고 달지는 않았죠. 너무 크고 이상적인, 어려운 단어를 써놓고 ‘거기에 가자’고 얘기한 게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바라보면서, 순간순간 오해와 어려움이 있겠지만, 둘 다 도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갖고 있는 자기 돌봄 혹은 자기 생존의 욕구와 더불어 이웃의 안녕을요. 결과적으로 나의 안녕에도 보탬이 되는 식으로 가면 좋지 않을까, 라는 질문으로 썼습니다. 가까운 이웃조차 온전히 사랑하기 힘드니까 종교도 생기고, 정치도 생기고, 이야기, 드라마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황: 그런 성경 구절이 있잖아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실천이 불가능에 가까운 어떤 말이니까, 모두가 자꾸 그걸 되뇌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책을 보면 이웃의 안녕을 걱정하고, 염려하는데 - 물론 때로는 알량하고 위선적이기도 하지만 - 계속 고민하길 멈추지 않잖아요. 어떻게든 계속 이웃 사랑을 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웃 사랑에 실패한 건 아닌 거겠죠?

김: 지금 해석해주신 부분에 크게 공감하는데요. 그게 출발이고, 또 어떤 때는 ‘그 정도도 어디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좋은 이웃’이라는 게 완성형 명사가 아니라 진행형 동사여도 충분하고, 우리가 서로 그렇게 촘촘하게 매번 비판하거나 심판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고민을 하고, 저는 그 번뇌의 순간도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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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신형철 평론가가 이런 평을 했잖아요.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해석을 섬세하게 잘해주셨어요. 예민하게 감각하고 현재적인 작품을 계속 써온다는 의미로 과찬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 사회 속에 사니 작품 안에 사회의 공기가 스미죠. 그런데 데뷔 때부터 고민했던 것 같아요. 기사나 르포나 다큐가 아니라 소설이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너무 선명한 작품은 때로는 멀리서 봤을 때 그 건물의 뼈대가 다 보여서 궁금하지 않은 집이 될 수도 있잖아요. 들어가기도 전에 ‘어? 무슨 집인 줄 알 것 같다’ 하고, 그래서 궁금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않는 집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고요. 그래서 너무 큰 뼈대가 아니라 냄새처럼, 무슨 집인지 모르고 독자가 들어갔다가 그 공간 잘 둘러보고 나갔는데 문득 내 옷에 냄새가 배어 있어서 어떤 생각을 환기할 수 있는 정도여도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할 수만 있다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아름다움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황: 사회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김: 수사(修辭)니까요. 수사는 사실이 아니니까요(웃음). 사회성이 있는 소설가라는 걸 좀 크게 말씀해주신 것 같습니다.

황: 저는 그래서 여기서 한 술 더 떠가지고 ‘김애란은 불가능해 보이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현대 철학자의 태도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한번 해볼까 하는데 어떤가요?

김: 어… 그거는 너무… 네, 그것도 이제 잘 읽어주셔서 과찬을 해주시는 거고요. 저는 그냥 기록하는 사람이고, 관찰하는 사람이고, 이야기의 형식을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누군가의 이웃이기도 한데, 노력하고 고민하는 사람이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웃음).

황: 사실 한 번 놀려보고 싶었습니다….

김: 네, 감사합니다.

황: 부동산 폭등기의 풍경(‘좋은 이웃’)이나, 마지막 단편 ‘빗방울처럼’엔 전세 사기의 피해자가 나오죠. 사회적 사건들이 작가님께 중요한 재료가 되나요?

김: 마지막 단편 같은 경우, 동시 진행형인 사건은 작가로서 쓰기 어려워해요. 새로운 사실이 계속 드러나는 쫓아가야 하는 경우엔 쓰면서 어려움을 느끼고 조심스럽죠. 그래서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다만 제가 자취방에서 출발했던 작가라 관심이 이어지기도 했고.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공기업 임원까지도 이렇게 정교하게 세팅된 프로그램 안에서 희생된 걸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겠다 싶었고요. 그런데 현상을 다루는 글은 많으니까, 저의 몫은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전해주거나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마지막(“안돼” “하지마” “살아”)이 너무 직접적인 메시지 같아도, 그래서 주저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꼭 드리고 싶었던 얘기라 그렇게 넣었습니다.

황: 불과 얼마 전의 일이잖아요. 아직 해결 못 한 분들도 많고요.

김: 취재하기 조심스러울 때는 기사가 많이 도움이 됩니다.

황: 기사를 보실 땐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고 보세요?

김: 당연히 고루 보는데요. 눈이 가는 세부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생활고 때문에 삶을 포기한 모자 분들 기사를 볼 때, ‘아들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고 엄마는 아들을 보고 누워 있었다’ 시선의 무게, 고개의 각도. 이런 걸 메모하죠.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세부들, 건조하게 기술된 목록들이지만, 통계나 사실의 언어보다 그런데 더 눈이 가는 것 같아요.

황: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도 궁금합니다.

김: 올해 약속된 단편을 좀 꾸릴 예정이고요. 산문집도 다시 새로 정리하고 있어요.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반기에는 독자분들 만나는 시간을 많이 가질 것 같아요. 이제 추수를 다했으니 다시 농번기에 들어가야죠(웃음).

이야기(story)에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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