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모호한 국가의 정체성이 문학적 다양성으로 피어났네

조선일보 황지윤 기자
원문보기

모호한 국가의 정체성이 문학적 다양성으로 피어났네

서울맑음 / 1.0 °
서울국제도서전 대만 문학 불티
18~22일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선 타이완(대만) 소설들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귀신들의 땅’으로 유명한 천쓰홍을 비롯해 류즈위·장자샹·궈창성 등 대만 작가 작품을 다수 펴낸 민음사 부스에선 개막 첫날부터 대만 소설이 불티나게 팔렸다. 민음사 관계자는 “매대에 깔아놓기가 무섭게 나갔다”고 전했다. 올 2월 출간된 문학 잡지 ‘릿터’가 커버 스토리에서 “타이완(대만) 소설이 뜬다”고 했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왼쪽부터 대만 작가 류즈위와 천쉐. /Allie Wang·잧경식 기자

왼쪽부터 대만 작가 류즈위와 천쉐. /Allie Wang·잧경식 기자


왜 지금 한국에서 대만 문학이 주목받는 것일까. 도서전에 참석한 대만의 대표 작가 천쉐(55)와 류즈위(45)를 통해 그 해답을 찾아봤다. 각각 퀴어·페미니즘 문학의 대표 주자로 “대만 문학에 태생적으로 내재한 유랑성과 부유성”(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부교수)을 보여준다. 백 교수는 릿터에 쓴 글에서 “타이완이라는 장소가 안고 있는 실존적 아포리아(난제)”를 강조했다. 대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양안(중국과 대만)이 갈등한다. 이 때문에 대만은 주변화되곤 하지만, 문학은 되레 꽃핀다. 현대 대만 문학은 주변인이 낯설지 않다. 여성·성소수자 등 다양한 주변을 끌어안으며 특유의 자유로움으로 독자를 매혹한다.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천쉐는 “‘악녀서’를 한국 독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지, 대만에서 첫 소설을 내놓던 30년 전처럼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고 했다. 1995년 작인 ‘악녀서’(글항아리)는 여성 간 성애 묘사 등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이유로 ‘18세 이하 열독 금지’ 딱지가 붙어 판매되다 결국 절판됐다. 천쉐의 책은 2000년대 초반까지 타이베이의 가장 큰 서점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어느 서점을 가도 내 책이 없었다. ‘아,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작가구나’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 앞에서 '악녀서',  ‘마천대루’ 등의 저자 천쉐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경식 기자

지난 17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 앞에서 '악녀서', ‘마천대루’ 등의 저자 천쉐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경식 기자


그러나 독자와 연구자들은 책을 잊지 않았다. 책은 절판 뒤에도 계속 회자됐다. 연구자들은 끊임없이 토론했고, 해적판 가격은 치솟았다. 변화는 10여 년 뒤 찾아왔다. 2010년 ‘악녀서’가 복간된 것. 작가는 “잃어버린 아이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고 했다. 이후 대만에서는 ‘동지(同志) 문학’이란 별도 용어가 있을 만큼 성소수자 문학이 대중화됐다. 작가의 우려와 달리 ‘악녀서’는 도서전 개막 첫날부터 당일 재고가 모두 소진됐다. 출판사 측은 급히 2쇄를 찍고 있다.

19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난 류즈위는 소설집 ‘여신 뷔페’(민음사)를 들고 도서전을 찾았다.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은 행동파”라는 그는 “내 안의 여성 혐오를 마주하면서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출산과 양육의 책임, 고부 갈등, 워킹맘, 자기 결정권, 가정 폭력 등을 소재로 대만 여성들을 비춘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그에게 대만 소설의 매력을 묻자 “다원화”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양한 가치, 이념, 생활 방식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것. 그는 “이런 점이 문학에도 잘 반영되고 있다”고 했다.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대만 작가 류즈위. /민음사 제공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대만 작가 류즈위. /민음사 제공


대만은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을 합법화했다. 중화권 작품을 다수 옮긴 김이삭 번역가는 “대만 작가들은 커밍아웃에 거리낌이 없다”며 “자유로운 대만의 사회 분위기가 퀴어·페미니즘 문학이 꽃피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귀신들의 땅’ ‘67번째 천산갑’을 쓴 대만 작가 천쓰홍도 게이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활동하는 작가 중 하나다.

[황지윤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