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극우 포퓰리스트가 번역한 혐오와 20대 정치 [기고]

한겨레
원문보기

극우 포퓰리스트가 번역한 혐오와 20대 정치 [기고]

속보
트럼프미디어 42% 폭등…원자력 TAE 테크와 합병
지상파 3사 출구조사 방송 갈무리

지상파 3사 출구조사 방송 갈무리




김내훈 | 작가·‘급진의 20대’ 저자



12·3 내란사태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30대 이하 남성들에게서 매우 논쟁적인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청년 남성들이 보수화를 넘어서 기어이 극우화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성별을 불문하고 청년 세대의 보수화와 극우화가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한국만이 그 물결로부터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한국 청년 여성의 경우, 계엄에 반대하는 ‘응원봉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실에 근거하여 청년 여성이 한국 사회의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라고 믿는 사람도 보인다. 하지만 30대 이하 여성 유권자 역시 내란을 옹호하거나 혐오 정치를 열어젖힌 김문수와 이준석에게 투표한 비율이 40대와 50대에 견줘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청년들도 정도의 차이일 뿐 성별 불문 극우화가 진행되는 것일까? 물론 ‘민주·진보’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극우라고 규정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비판도 있다. 청년 극우화에 대한 이런 반론들은 공통적으로, 청년의 투표는 유동적이며, 사회경제적 불안감과 정치적 소외감의 표출이자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며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한다. 나 역시 이런 맥락에 동의한다. 하지만 내란 수괴를 배출하고 옹호하던 정당의 후보보다, 생방송 토론회에서 ‘성폭력 재현’을 하는 후보보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역임하고 계엄 해제를 이끌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의 미지의 미래에 더 큰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세계관은 무엇에 기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이 부족하다.



이에 나는 ‘청년 과격화’라는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과격함’이란, 특정 세력에 대한 지지나 뚜렷한 이념이 형성되기 이전의, 맹아적 상태의 강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양상은 이른바 ‘급발진’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정 정치인이나 이슈 등 제반 사안에 대한 판단의 축이 극호(신격화)와 극불호(극혐)라는 양극단만 남아 있으며, 외부로부터 입력된 정보에 대한 반응이 반사적으로 양극의 형태로만 표현되는 것이다. 입력된 정보가 반응으로 출력되려면 삶의 궤적에서 누적한 경험과 지식을 돌아보는 성찰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그 대신에 온라인에서 본 이미지나 밈의 인상이 출력 과정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이는 즉각적인 쾌락을 주는 온라인 콘텐츠에 익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서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특징이다.



이를테면 청년들의 투표 경향으로부터 ‘586의 위선에 대한 반감’을 읽어내는 것은 오히려 표면적인 분석일 수 있다. 2021년 한국방송(KBS)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인식조사를 보면, 20~34살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가 ‘586’이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586세대는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라는 문항엔 80%가 동의했다.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한 셈이다. 이것이 사실상 오늘날 ‘청년 문제’의 핵심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 온라인에서 본 이미지와 이야기를 주워 담아 반사적으로 극혐의 정서를 채택하는 것이다. 실제 인터넷 밈의 유행으로 인해 ‘이재명’ 하면 따라붙는 ‘25만원’, ‘드럼통’ 등에 연관된 부정적 인상을 근거로 그에 대한 판단을 종결하는 게 청년 남성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넘쳐나는 악마화 정서였다. 물론, 청년 여성도 이런 극혐의 정서에서 자유롭진 않다. 2022년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파업을 떠올려보자. 캠퍼스 게시판에 잔뜩 쓰인 ‘노동자 아웃(OUT)’은 파업의 부정적 이미지와 자신의 불편에 대해 반사적인 불호 정서를 강하게 표시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불안정한 사회경제 구조에 기인한 청년들의 불만은 실재한다. 다만 정치적으로 표출될 언어를 갖추지 못한 채 ‘청년 과격화’로 떠돈다. 극우 포퓰리스트가 하는 일은 이런 경향에 탑승하여, 그 떠도는 불만들에 자신들의 천박한 언어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일종의 번역가와 같다. 어떠한 정치적인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요구와 불만이 있을 때 그것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이다. 현재 수많은 청년이 그 천박한 언어로부터 표현 방법을 찾는다.



따라서 관건은 극우 포퓰리스트의 언어를 공론장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더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와 불만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어휘력을 갖춰야 한다.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