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은 다음 세대 막는 장벽
왜 아직도 깃발과 선봉인가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
발목 잡지 말고 이제 비켜서자
왜 아직도 깃발과 선봉인가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
발목 잡지 말고 이제 비켜서자
김별아 소설가 |
대학 졸업 25주년 기념 동문 재상봉 행사에서, 나는 다시 만난 친구들 앞에 머리 숙여 사과했다. 스무 살의 나는 나만이 옳고 정의롭다고 믿었다. 거악(巨惡)에 대항하고 있으니 사소한 잘못이나 절차상 문제는 눈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낸 학생회비로 몰래 수배자들을 지원하거나, 동맹 휴학을 이끌며 강의를 방해하기도 했다. 학생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휘몰아쳤던 열정은 때로 타인의 평온한 일상을 짓밟았다. 광장에 나오지 않던 친구들의 삶을 “의식 없다”는 말로 매도하기도 했다. 세월과 삶의 찰과상을 앓는 동안, 나는 회한과 비탄 속에 자신을 무너뜨리며 배웠다. 욕망과 모순의 세계에서 절대악이나 절대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은 다만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뒤늦은 사과를 받은 친구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용기가 없어서 피하고 외면했던, 우리도 부끄럽고 미안해.” 사나운 시대는 저마다에게 크고 작은 상흔을 남겼다. ‘운동’ 대신 학위나 취업 등 개인적인 성취를 좇은 것이 비난거리가 될 수 없음에도, 어떤 친구들은 시대에 복무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을 품은 채 살았나 보다. 지금 광장과 SNS에서, 용도 폐기된 줄 알았던 옛 구호를 외치는 동세대 중 적지 않은 수의 심리도 이러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80년대’에도 정작 ‘운동권’은 소수에 불과했으니.
그럼에도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 평범한 개인의 파괴력은, 시대를 넘어 반복된다. 그 시절 나에게 “좀 입체적으로 살 수 없냐”고 충고했던 조숙한 친구가 이제 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지금이 그때보다 더 엄혹한 정국인지, 인생에는 방황과 반항의 총량이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광장의 새된 구호는 이념의 갈등이라기보다 시간의 오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리석은 채로 용맹했던 나의 청춘이 그들의 모습에 얼비친다. 당혹스럽고, 쓸쓸하다.
하지만, 강은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며 흐른다. 애당초 세대를 가르는 이름은 그들이 시대적 역할을 마쳤다는 신호로 붙여진다. 너무 일찍 호명된 ‘586’은 기억이 아니라 권력이 되었고, 다음 세대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586’ 세대의 이중성에 대한 젊은 세대의 비판은 뼈아프다. 역사의 현장을 살아낸 자부심과, 시대가 요구하는 퇴장을 주저하는 미련을 동시에 갖는 건 욕심 사납다는 말을 들을 만하다.
한동안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이 상처인가 영광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훈장처럼 자랑한다. 어쨌든, 누가 무어라 하기 이전에 우리는 기성세대다. 지금 세상이 나쁘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우리에게 있다. 개혁이든 혁명이든 우리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여전히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겠다는 생각은, 과거를 현재에 과잉 투사하는 보상심리나 시대착오에 가깝지 않을까. 늦깎이 열정은 자칫 다음 세대의 발목을 붙드는 그림자가 된다. 젊은 세대는 우리의 자식이자 제자이며, 우리가 싸워 얻은 공간을 살아갈 사람들이다. 한때 꿈꾸었던 더 나은 세상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길 한가운데서 비켜서야 마땅하다.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집단의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개인의 탄생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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