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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와 셰에라자드가 만났을 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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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와 셰에라자드가 만났을 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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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컷. 배급사 제공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컷. 배급사 제공


최근 극장가에는 재개봉 바람이 불고 있다. 사랑했던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다. 그래도 ‘붐’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이어지는 재개봉 열풍에 대해선 다소 거리감을 느낀다. 영화를 즐기는 문화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영화를 팔려는 고육지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언제나 상품이었으므로, 이건 고리타분한 영화광의 순진한 한탄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이것이 내가 지면에서 재개봉 영화를 잘 소개하지 않는 이유지만, 오늘만큼은 피해가기가 어렵겠다. 18년 만에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감독판으로 돌아온 타르셈 싱의 ‘더 폴: 디렉터스 컷’ 때문이다.



타르셈 싱은 꽤 흥미로운 아티스트다. 인도계 미국인인 싱은 1990년대 상업 광고로 감독 이력을 시작했다. 광고계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이국적인 이미지와 톡톡 튀는 상상력이 결합된 독특한 작품들이었다. ‘펩시’로 코끼리를 조련하는 인도 남자라거나 ‘모토롤라 레이저’로 결투를 벌이는 남녀 등 그 기발함이 2025년에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



영화감독으로서도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장편 데뷔작인 ‘더 셀’(2000)은 ‘소년의 악몽’이란 주제를 화려한 비주얼로 다루었고, ‘백설공주’(2012) 역시 같은 해 같은 테마로 개봉한 디즈니의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에 비하면 ‘수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일곱 난쟁이의 캐릭터가 훌륭했다. 그 일곱 사람은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그들이 ‘로빈 후드’로 변신할 때 착용하는 신체가 연장되는 가젯의 디자인은 그야말로 힙하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컷. 배급사 제공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컷. 배급사 제공


싱은 1분짜리 광고에 어울리는 심플하면서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예사롭지 않은 감각을 통해 환상적인 이미저리(육체적인 감각이나 마음속에서 발생하여 언어로 표출되는 이미지의 통합체)로 증폭시키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증명해왔다. ‘더 폴’ 또한 이 궤적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살바도르 달리와 셰에라자드의 만남.” 누군가가 ‘더 폴’에 대해서 한 말이다. 그럴듯한 묘사다.



영화는 1920년대 엘에이(LA)의 한 병원을 배경으로 한다. 이민자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운타루)는 팔이 부러져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다. 특유의 활달함으로 병원 안을 탐방하고 다니던 소녀는 허리가 부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와 만난다. 로이는 소녀에게 다섯 남자의 모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는 곧 화면 위에서 이국적이고 초현실적인 비주얼로 변주된다.



로이는 소녀가 자신을 계속해서 찾아오도록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엘에이판 셰에라자드(‘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꾼)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우정이 깊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로이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그건 바로 이야기로 알렉산드리아를 사로잡아 모르핀을 훔쳐오게 하려는 것. 허리를 다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된데다 연인까지 잃은 그는 모르핀이 이끄는 편안한 죽음을 꿈꾸고 있다.



싱은 컴퓨터그래픽(CG) 없이 세계 20여개국에서 실사 촬영을 하면서 로이의 이야기 속 세계를 그려냈다. 이미 마법과도 같은 공간을 화면에 담았으므로, 거기에 또 다른 마법, 즉 시지를 얹을 필요가 없었다는 게 싱의 설명이다. 이 이미지들의 연쇄를 보고 있으면 영화라는 매체의 마술적인 힘에 다시 빠져들게 된다. 놀랍도록 발전한 시지 기술에 죽은 배우들까지 살려내는 딥페이크(이미지·음성 합성기술)까지,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구분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영화적 이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컷. 배급사 제공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스틸컷. 배급사 제공


내가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진 순간은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와 대화를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벽에 역전된 말의 잔상이 비치는 걸 보고 그에 매료된다. 영화 기술의 시작이었던 카메라 옵스큐라의 작동 메커니즘을 스크린 위에 구현하면서, 싱은 선언한다. “지금부터 진짜 영화가 시작되는 거야.” 그래서 싱이 알렉산드리아 역을 위해 영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배우를 찾았다는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로이가 스턴트맨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다. 초창기 영화의 스펙터클을 창조했던 건 시지가 아니라 배우들의 몸과 그들이 직접 만들어내는 스턴트였다.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그런 위험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영화의 역사를 빚지고 있다. 싱은 ‘더 폴’의 마지막에 무성영화 시대의 스턴트 클립들을 이어 붙이며 그들의 위대한 퍼포먼스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영화를 이루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이야기다. 모든 영화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스펙터클만큼이나 이야기에 이끌린다. 로이의 ‘이야기’가 알렉산드리아를 매혹했던 것처럼.



재미있는 건 ‘더 폴’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영화는 부서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 상처와 흔적을 안고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일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로이의 이야기는 결국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와 만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구불구불 흘러간다. 함께 만드는 이야기의 힘.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끝의 끝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손희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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