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초상. 1789년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위키미디어 코먼스 |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20세기 현대 음악의 아버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만든 음악은 지금도 일반인들이 듣기에 어려운 편이다. 정작 쇤베르크는 스스로를 일종의 고전주의자로 여겼다. 한 강연에서 그는 고전 작곡가들로부터 배운 것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로부터는 “부차적인 관념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배웠다고 말했다.(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음악 이론은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모차르트 음악을 듣다 보면 대개 이런 패턴이 느껴진다. 먼저 주제가 나타난다. 굳이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인심 좋게 제시되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멜로디이다. 그러다 도중에 낯선 주제가 장식처럼 잠깐 등장하더니 슬며시 사라진다. 그런데 곡이 끝날 때는 어느 틈에 이 두번째 주제가 곡의 주인이 되어 있다.
모차르트 하면 천의무봉(天衣無縫), ‘하늘의 옷처럼 바느질 자국이 없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제는 방송국에서 참신한 표현으로 바꿔 줄 때도 됐다는 생각이지만 사실 적절한 비유인 건 맞다. 지배적인 첫번째 주제와 부차적인 두번째 주제의 위치가 역전되는 게 모차르트 음악의 드라마인데, 그 뒤집힘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그게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한 여성이 너무 힘든 나머지 연인의 옛날 주소를 찾아 편지를 보낸다. ‘당신 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에 답장이 온다. 잘 있는데 당신은 누구세요? 알고 보니 답장한 사람은 연인과 같은 중학교를 다닌,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여성이었다. 아 그애요. 당연히 알죠.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나는 얘기가 있으면 알려 드릴게요. 두 여성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한 사람은 너무 절실해서. 또 한 사람은 그냥 좀 재미있어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모르는 분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처럼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영화도 드문데, 모차르트식 위치의 역전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작품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끝에 관객은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을 ‘발견’하는 경험을 한다.
“주제 하나로 밀고 나가지 말고 중간에 다른 토픽을 하나 집어넣으세요.” 회사에서 다른 직원들이 쓴 글을 봐줄 때면 나는 말하고는 했다. “그래야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지 않아요.” 주제가 둘이 되면 글이 산만해지지 않냐고 의아해하는 직원에게는 이렇게 일러줬다. 나중에 나온 주제가 주인이 되게 해서 끝내 보라고. 그러면 따분한 보고서나 소개문도 드라마같이 보일 거라고. 이런 얘기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러브레터’가 바로 그런 구조라고 하면 쉽게 이해됐다.
‘러브레터’에서 두 역할을 연기했던 나카야마 미호가 며칠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추모 글들과 함께 그녀가 눈 덮인 산에서 “오겐키데스카(잘 지내시나요)”라고 외치는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재소환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퇴장과 주인공의 교체를 의미하는 장면을 말이다. 영화는 그녀가 연인의 부재를 깨닫는 데 3년이 걸렸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존재를 깨닫는 것은 훨씬 어렵다. 두번째 주인공은 자기가 이미 가진 것을 발견하는 데 10년이 걸린다.
아마 행복한 삶의 공식은 이런 것이다. 부재와 존재를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것. 그리고 되도록 존재를 더 많이 발견할 것. 그래서 문학과 예술이 지금도 필요한 것 아닐까. 그 발견의 시간을 단축해 줄 더 나은 교육 프로그램은 달리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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