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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장원재기자의 스포츠人]"다이어트 복싱 번성...팬층 확대되면 한국복싱 부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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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배 WBC 국제심판

아시아투데이

WBC 국제심판/KBM 심판 임준배/ 사진제공=한국복싱커미션(K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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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스포츠전문 기자 = 한때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복싱 세계 타이틀매치를 두 번째로 많이 개최하는 나라였다. 지금은 언제 세계타이틀전이 열렸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WBC(세계복싱평의회) 임준배(63) 국제심판은 그래서 한국 복싱의 패스포트다. 그는 지금도 세계타이틀매치 심판을 보러 전 세계를 누빈다. 언젠가 한국 복싱이 다시 세계로 나아갈 때, 그의 경력과 인맥은 우리 복서들의 여권 노릇을 틀림없이 할 것이다.

- 언제부터 복싱에 빠졌나.

"1972년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때부터 TV 중계는 빠지지 않고 시청했고 서울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거의 다 직관했다. 그때부터 복싱에 빠져들었다."

- 어린 나이였는데, 경기장엔 혼자 갔나.

"집이 을지로 쪽이라 장충체육관과 멀지 않았다. 아버님이 데려다주고 표 사서 넣어주고 집에 가셨다. 아버지는 복싱에 별 흥미가 없으셨다. 몰래 들어간 게 아니라, 당당히 표 사서 들어갔다."

- 당시 기억나는 경기라면.

"1960년대가 지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국제전이 많아지고, 세계 타이틀을 노리는 선수도 생겼다. 제가 처음 복싱을 봤을 때 간판선수는 류제두, 이창길, 홍수환, 장규철, 염동균, 김현치 이런 분들이었다. 다들 세계 랭커고 동양 타이틀도 갖고 있던 시절이다."

- 직접 권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나.

"중학교 때 체육관을 좀 다녔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운동하는 걸 사회적으로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집에서 반대하셔서 선수 생활은 못 했다."

- 어떻게 심판의 세계에 입문했나.

"그전까지는 선수 출신만 심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 권투협회에서 문호를 개방했다."

- 상황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

"우리나라에서 세계 타이틀 매치도 많이 하고 또 해외에서 열리는 세계타이틀전에 배정도 받아서 해외에 나갈 기회가 많았다. 당시 심판 위원회장께서 '영어가 가능하고 복싱에 조예가 있는 사람을 추천받고 싶다'라고 해서 심판이 됐다. 그 이후로 계속 복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 그럼 30~40대 때는 복싱과 무관한 일을 했나.

"저는 심판이 되고도 최근까지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직업은 따로 있었다. 복싱만으로는 생계 해결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30~40대는 그냥 혼자서 복싱을 즐겼다."

- 현업은 뭔가.

"30년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 후 쿠치나 엘이라는 주방용품 회사를 설립했다. 전국 유명 백화점 등에 매장 78개를 운영하고 있다."

- 한국 복싱계에는 '임준배의 복싱 스크랩북'이 유명하다.

"자료를 모으는 습관이 있어서 경기 팸플릿이라든지 당시의 잡지 등을 버리지 않고 다 챙겼다. 지난 50년 동안 복싱 관련 신문 기사도 다 모았다."

- 스크랩북에는 '소년 임준배'의 코멘트도 있다.

"그걸 어떻게 보셨나? 신문 기사 스크랩북은 좀 없어졌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 유일했던 복싱 전문 잡지 '펀치 라인'이 1973년에 창간됐는데 폐간호까지 다 가지고 있다. 정기 구독자였다."

- 해외 자료도 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매스미디어나 인터넷이 미발달한 시대였다. 그래서 해외 소식을 알려면 일본 잡지도 좀 봐야했다. 1976년부터 구독 중인 일본 잡지도 다 보관하고 있다."

- 심판 데뷔전은 어떤 경기였나.

"선수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4라운드 경기였다. 처음 몇 년은 4라운드와 6라운드 경기만 심판을 봤다."

- 왜 그랬나.

"그 당시에 일본하고 우리나라에만 있던 제도인데 심판 등급을 a, b, c로 나눴다. 능력과 상관없이 c급에서 4~5년 연한을 채워야 승급이 됐다. b급은 8회전, 10회전 논타이틀까지, a급이 되면 모든 국제전과 타이틀 매치 심판을 볼 수 있었다."

- 심판 데뷔 시점은.

"2002년이다. 차츰차츰 등급이 올라가면서 중요한 경기 심판을 많이 봤다."

-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판정에 불복해서 난동이 벌어졌다. 링으로 의자가 막 날아 들어왔다."

- 주심, 부심 합쳐서 몇 경기나 봤나.

"복스렉에 기록된 경기는 주심 200여 경기 포함, 400경기 정도다. 2000년대 한국권투위원회(KBC) 분란으로 저뿐만 아니라 당시에 심판들의 기록 4~5년 분량이 없어졌다. 그 기록까지 합산하면 조금 더 많을 거다."

- 복싱 주심은 직접 선수들 사이로 들어가야 하고 여러 판단이 빨라야 한다.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나.

"선수 2명이 주역이고, 레프리는 안전하게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써드맨이다. 가능하면 팬들의 눈에 띄지 않는 레프리, 레프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경우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긴박하게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선수의 안전에 관한 경우다.

"개입해야 할 때는 확실하게 개입해야 한다. 처음 시작하는 후배들한테 '너무 긴장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릴렉스하지도 말아라. 좀 편안한 마음으로 하되 속된 말로 다른 생각 가지고 링에 올라가지 말라'고 조언한다. 저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 주심이 경기를 끊는, 그러니까 두 선수 사이로 개입하는 경우는 정말 순간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건 감각이다. 경력을 쌓다 보면 느낌이 온다. 사실 이럴 때 딱 끊어야 한다고 정해진 룰은 없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과정, 특히 직전 라운드까지의 과정을 보면 답이 나온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똑같이 펀치를 허용하더라도 데미지가 다르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눈을 봐야 한다. 아무래도 링에서 선수들과 가까이 있다 보면 그들의 호흡 소리라든지 신음소리라든지 그다음에 그 직전 라운드까지의 데미지가 보인다. 제 감각으로는, 주먹이 날아올 때 머리가 20도 이상 흔들리면 뇌에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야 한다. 스톱시킬까 어쩔까 고민하면 이미 늦은 거다."

- 최근에 심판을 본 경기는.

"KBM(사단법인 한국복싱커미션) 소속 심판 위원으로 KBM 주최 경기에 나간다. 매달 경기가 있다. 10월, 11월엔 월 4회씩 대회가 열렸다. KBM에선 심판 외에 국제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 최근에 본 세계 타이틀 매치는.

"요즘은 세계 타이틀 부심으로 주로 나간다. 올해 1월에 일본에서 라이트 플라이급 켄시로 방어전, 3월에 사우디아라비아가서 WBC 페더급 타이틀전, 11월에 또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서 라이트급 세계 타이틀 매치 부심을 봤다. 5월엔 중국 가서 WBC 지역 타이틀전 주심을 봤다."

- 한국 복싱은 지금 세계 랭커도 거의 없는데, 그래도 심판으로서는 세계 타이틀 매치에 참여한다.

"지금 미국, 일본에 세계 챔피언이 많으니까 심판 배정에 유리한 점은 있겠지만, 심판은 어떻게 보면 개인 역량이다. 지금도 나가보면 벨기에, 스위스 심판도 자주 만난다. 사실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곳은 프로복싱이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 친구들이 아마추어 선수 생활하고 아마추어 심판보고 프로복싱 세계 기구에 들어와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역량이 되니까 심판 배정을 받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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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배 심판은 1년에 3~5차례 세계타이틀전 심판을 본다./ 사진제공=임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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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BC는 언어 시험이라든가 심판 라이선스 절차가 있나.

"그런 것은 안 보고, 제일 첫 번째 스텝은 매년 열리는 총회다. 라스베거스에서 열릴 때도 있고 멕시코에서 열릴 때도 있고 아시아에서 열릴 때도 있다. 일단 멤버십 신청하고 세미나에 참석해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

- 그 다음 과정은.

"추천받든지 기회를 잡아서 해외 경기를 가면, 세계 타이틀이든 지역 타이틀이든 항상 감독관이 있다. 감독관이 하는 일은 경기 끝난 후 선수들 도핑 테스트, 운영보고서 작성이다. 프로모터는 어땠나, 합당한 숙소를 제공했나, 운영진에 제공한 음식, 경기장 시설, 심판 평가 등을 한다."

- 그 리포트가 참 중요하겠다.

"그렇다. 각각의 심판이 낸 채점표 평가, 언어 능력 등을 본다. 언어 소통도 안 되고 판정 점수도 이상하다면 그 심판은 배정이 안 되고 곧 도태된다."

- 편파 판정도 있고 2 대 1 스플릿 디시젼도 있다.

"이상한 2대 1 판정, 그러니까 차이가 좀 났는데 혼자 거꾸로 판정한 심판들을 제 경험으로 보면 한두 번 보이다가 슬슬 없어지더라."

- 세계타이틀전 심판은 몇 명이나 있나.

"세계적으로 WBC 멤버 심판은 수백 명이다. 그 중에서 세계 타이틀에 나서는 심판은 20명 내외다. WBC 같은 경우는 미국의 북미복싱협회(NABF), 유럽복싱연합(EBU) 같은 예하 단체 소속 심판을 우선 배정한다. 멕시코, 일본에 약간 명, 우리나라에 두 세 명, 태국에 또 몇 명이 있다. 배정은 랜덤이다."

- 얼마나 자주 세계타이틀전 심판을 보나.

"그때그때 다르지만, 저 같은 경우는 1년에 서너 번 세계타이틀전 심판을 본다. 운이 좋은 거다. 제가 레귤러 멤버라는 뜻이다."

- 한국 복싱은 왜 몰락했나.

"한국 복싱은 그동안 흥행에 실패하고, 일부 프로모터들이 전성기 때의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1980~1990년대 전성기를 누를 때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던 업보가 크다. 너무 TV 중계에 의존하다 보니 팬에 대한 배려라든지 자생력을 갖추는 일을 소홀히 했다. TV와 대중 매체가 프로야구라든지 프로축구 같은 종목을 다루면서 복싱 콘텐츠의 독점이 깨지고 프로모터들이 갈 길을 잃은 거다."

- 그 이후에도 문제가 많았다.

"자본이 없으니 이벤트 개최 횟수가 뚝 떨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 현상을 겪었는데 우리와 달랐던 점이 있다. 일본 복싱계는 단합했고 우리나라 복싱계는 분열했다."

- 얼만큼 분열되었나.

"제가 처음 심판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복싱 단체는 사단법인 KBC 가 유일했다. 지금은 4~5개 기구가 생겨났다."

- 부활 가능성 있나.

"있다. 복싱이 완전히 바닥을 쳤는데, 근래 한 5~6년 전부터 젊은 세대들이 프로모터로 들어오면서 사업환경을 바꾸고 있다. 아시아권에서 통할 만한 선수들도 좀 나왔다."

- 아직 세계 챔피언 감은 없나.

"그전에도 굉장히 소질 있는 선수들이 나왔지만, 지속적 뒷받침이 안 되니까 중도 포기를 했다. 지금은 경기도 꾸준히 열리니까 지금 자라나는 선수 중에 스타가 나올 거다. 향후 1~2년 안에 적어도 세계타이틀전에 출전할만한 선수가 나오리라 기대한다."

- 우리나라 선수가 출전한 마지막 세계타이틀전은 언제였나.

"지인진 선수가 마지막 세계 챔피언이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 얘기다. 그 이후에는 2013년 11월에 손정오 선수가 세계 타이틀 매치를 가졌다. 제주도에서 열린 경기지만 일본 프로모터가 개최한 경기다."

-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복싱은 현재 대중 매체로부터 너무 소외되고 있다. 하지만 올드팬과 젊은층의 잠재적인 팬은 많다고 생각한다. 또 복싱 자체의 인기는 줄었지만 생활체육, 다이어트 복싱은 번성한다. 저변도 넓다. 그래서 경기가 열리면 일행이라든지 친구, 동료들이 경기장에 표를 사서 입장한다. 특히 젊은 층이 많이 온다. 굉장히 좋은 현상이다. 팬층의 규모가 확대되면 한국 복싱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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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배 WBC 국제심판(왼쪽)과 장원재 전문기자./ 사진제공=전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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