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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outlook] 창단 첫해 0-34 패배…25년 후 기적을 쓴 교토국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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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교토국제고가 21일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아오모리야마다고와의 전국 고교야구선수권 준결승에서 3-2로 이겼다.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는 창단 후 처음 결승에 진출했다. [교도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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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들이 설립해 운영 중인 교토국제고가 일본 최고 권위의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일명 여름 고시엔(甲子園)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23일 오전 10시부터 간토다이이치고와 우승 트로피를 놓고 마지막 일전을 벌인다.

이 학교에 야구부가 처음 만들어진 25년 전에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한 관계자들이 있었을까. 당시 교토국제고는 ‘교토한국학원’이라는 이름의 외국인학교였다. 일본의 학교교육법상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각종학교로 분류돼 일본고교야구연맹으로부터 특별 승인을 받고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첫 공식 경기 결과는 0-34. 말 그대로 대패였다.

교토국제고는 지난 2004년 현재 명칭으로 교명을 바꾸면서 학교교육법상 일반 고교로 승인을 받았고, 이후부터 재일한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 국적 학생들도 입학할 수 있게 됐다. 2008년에 이 학교 출신 신성현(현 두산 2군 전력분석원)이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지명을 받아 프로 무대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자이니치(재일한국인)와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실력 있는 야구 선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토는 고교야구 강자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보니 ‘꿈의 무대’로 불리는 고시엔 무대에선 한참 뒤인 2021년에야 두각(4강)을 나타낼 수 있었다.

여름 고시엔은 특별하다. 이 대회에서 탈락하면 3학년 학생들은 더 이상 공식 대회에 나서지 않는 게 관례다. 이를 ‘은퇴’라 표현한다. 때문에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은 여름 대회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연습하고, 비장한 각오로 경기에 임한다. 의미가 큰 대회다 보니 주최사인 아사히 신문 뿐만 아니라 요미우리 신문이나 마이니치 신문 등 경쟁지들도 대회 기간 중 취재기자를 고시엔 구장에 파견해 주요 소식을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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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25년 만에 결승에 오른 교토국제고를 응원하는 관중. 김현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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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 또한 고시엔 대회에 참여하는 게 영광이다. 교토국제고가 속한 교토 예선의 경우 총 73개 팀이 출전했는데, 본선 출전권은 단 한 장 뿐이었다. 고시엔 구장을 밟은 교토국제고는 지역 예선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72개 팀의 염원과 함께 하며 이번 대회에 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처럼 교토국제고의 교가는 한국어다. 지난 2021년에 고시엔 본선 무대에 처음 나섰을 때도 한국인 선수들과 일본인 선수들이 한 목소리로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일본 사회에서 이 부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만, 대부분은 호감도, 반감도 갖지 않고 해당 학교의 역사이자 전통으로 받아들인다.

한일 관계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교토국제고 선수들의 경기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 일본 고교야구를 즐기는 팬들은 선수들의 매너나 경기에 임하는 태도를 유심히 본다. 교토국제고는 선수들의 스포츠맨십이 남다를 뿐만 아니라 경기 분위기도 박진감과 긴장감이 넘쳐 호평을 받는다. 일본 고교야구는 통상적으로 한 경기를 치르는데 2시간 정도 걸리지만, 이번 대회는 극심한 무더위로 인해 진행 시간이 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교토국제고가 결승에 오르기까지 치른 5경기의 평균 소요시간은 1시간54분에 불과했다. 두 왼손 투수 나카자키 류이(中崎琉生)와 니시무라 이키(西村一毅)의 제구력이 좋고 수비도 탄탄하기 때문에 경기 시간이 짧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안타는 중장거리보다는 단타 위주다. 5경기에서 기록한 57개의 안타 중 2루타 이상은 8개 뿐이었다. 홈런 한방으로 끝내는 대신 안타를 끊임 없이 연결해 팀 전체가 함께 득점을 생산하는 야구다.

이런 방식의 야구는 교토국제고의 열악한 훈련 환경과 맞닿아 있다. 교내 야구 훈련장은 홈 플레이트를 기준으로 왼쪽 끝이 70m, 오른쪽 끝이 60m에 불과한 미니 구장이다. 하지만 고마키 노리츠구(小牧憲継) 교토국제고 감독은 환경을 탓하는 대신 이에 적응하는 훈련 방식으로 선수들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타격 훈련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대신 수비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타격도 높고 멀리 치기보단 낮고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집중했다. 이러한 훈련의 성과가 특유의 ‘릴레이 단타 야구’로 나타났다.

일본의 야구 선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있다면 한국인이 세운 학교여도, 교가가 한국어라도 개의치 않는다. 교토국제고 야구부 선수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지만, 한국 민족학교에서 공부와 야구를 배운 이들이 언젠가 미래의 한일관계를 이끌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다.

교토국제고는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여름 고시엔의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일본 야구문화의 근원이라 불리는 고시엔 무대에서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쾌거를 이룰 수 있다면 한일간 이해가 더 깊어지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을까. 정상까지 한 걸음만을 남겨둔 교토국제고 선수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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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 히로시(大島裕史)=1961년 도쿄 출생. 메이지대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건너와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이후 지한파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지난 1997년 ‘일한 킥오프 전설’로 일본 최고 권위의 미즈노 스포츠 라이터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재일 코리안 스포츠』 『한국야구의 원류』 등이 있다.

오시마 히로시 일본 스포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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