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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만화계 오스카상’ 후보로… “대중성은 고려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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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 승부사들] [29] 웹툰 작가 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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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액션 장르를 넘나드는 정지훈은 자신의 장르를 “진중함”이라고 규정했다.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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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만화상이자 ‘만화계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아이스너상 국제 작품 아시아 부문에 한국 작가 정지훈(34)의 웹툰 ‘수평선’이 이름을 올렸다. 1988년부터 시상을 시작한 유서 깊은 상이다. 한 해간 미국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가 대상작이다. 과거 데즈카 오사무·미야자키 하야오·이토 준지 등 굴지의 일본 만화가들이 아시아 부문 상을 휩쓸었다. 한국 만화가 김동화, 김금숙 등이 앞서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올해도 아시아 부문 후보 여섯 중 다섯이 일본 만화다. 하지만 ‘JH(정지훈이 해외에서 쓰는 작가명)’는 절대 뒤지지 않는다. 일본 만화계에서도 정평이 났다. 일본 유명 만화 ‘원피스’ ‘블리치’ 등의 연재를 담당한 ‘주간 소년 점프’의 전설적인 편집자 아사다 다카노리는 “JH 선생의 웹툰 ‘더 복서’를 보고 충격받았다”고 했을 정도. 오는 26일(현지 시각) 수상 결과 발표를 앞두고 정지훈 작가를 이메일로 만났다.

“만화가를 꿈꾼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중학교 시절 1세대 웹툰 작가인 강풀·하일권 등의 작품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웹툰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한국 애니메이션고 만화창작과 출신인 정지훈은 2009년 고등학교 졸업 작품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네이버 카페,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 올렸다. “의무적으로 그려서 내야 하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정말 그리고 싶었던 만화였고, 열심히 작업했기에 여기저기 올렸는데 독자들이 좋게 봐주셔서 신기했어요.”

이를 계기로 스카우트돼 ‘야후! 카툰세상’에 연재를 시작했다. 큰 사고로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주인공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이 비친다는 내용. 연재 당시 누적 조회 수 500만회를 기록했다. 이후 레진코믹스, 다음 웹툰, 네이버 웹툰 등에서 ‘수평선’(2016), ‘아포칼립로맨스’(2017), ‘모기전쟁’(2017~2018), ‘더 복서’(2019~2022) 등을 연재하며 스타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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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원피스' 편집자 아사다 다카노리가 "충격적"이라고 평했던 정지훈 작가의 웹툰 '더 복서'(왼쪽)와 웹툰 '모기 전쟁'.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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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너상 후보에 오른 ‘수평선’은 2016년 작품으로 그의 초기작에 해당한다. 웹툰 마니아들 사이에선 ‘띵작(명작을 뜻하는 신조어)’으로 회자된다. 스크롤을 내리면 작가의 표현력과 연출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강렬히 빨아들일 줄 안다. 정지훈은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 “삶에서 작품을 남기는 것 말고 도저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진심을 담아 작업한 작품이에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계가 배경이다. 총성과 비명이 오가고 전염병이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그 와중 살아남은 어린 소년과 소녀가 주인공. 두 아이가 손을 꼭 잡고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그는 “우리 모두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떠서 끝없이 다리를 허우적거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 있다. 이 삶 속에서 제가 얻은 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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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수평선'의 주인공 둘은 희망을 놓지 않고 길 위를 뚜벅뚜벅 걷는다. 정지훈은 본지 인터뷰에서 "소년·소녀는 지구가 둥글기에 영원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길에는 끝이 있고 깊고 어두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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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이 한국 독자를 넘어 해외 평단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는 뭘까. 작가는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 기독교적 상징을 읽어내는 독자가 많다는 점이 힌트가 된다. 동서양을 아우르고, 문화권을 넘나드는 보편적 메시지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지훈은 “사실 기독교 복음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그린다”고 고백했다. “제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입니다. 평생에 걸쳐 ‘구원’에 대해 알아가고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제가 경험한 강렬한 사랑이 작품을 그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어떤 경험인지 묻자 “인터뷰에서 말로 하기보다는 작품으로 남기겠다”는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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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를 그린 웹툰 ‘수평선’은 대부분 흑백 톤으로 그려졌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랑 결혼해줄래?” 주인공 소년·소녀가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만큼은 까맣고 하얗던 만화 속 세상이 샛노란 색으로 물든다.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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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고민하지는 않는다. ‘해외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리기도 하는가’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정지훈은 “‘수평선’은 작가주의 작품이라 상업적으로 크게 도움이 안 되는 작품이었을 수 있다”면서 “작품성을 알아봐 준 분들 덕분”이라고 했다. “작가주의냐 대중성이냐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고 했다. 30대의 이 웹툰 작가는 장르를 웹툰에 한정 짓지 않는다. 그에게 웹툰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존재와 구원에 관한 군상극(群像劇)을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그는 “소설에도 도전하기 위해 시도 중”이라고 했다.

수상 발표를 앞두고 그는 “참 감사하고 신기하지만, 평소와 다를 건 없다. 이야기란 어떤 상을 받았는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어떻게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상을 받으면 어떨까 묻자 ‘네임드(잘 알려진) 작가’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자그마한 답이 돌아왔다. “스스로가 작고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요.”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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