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대규모 자수전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통자수부터 미술공예로 발전 과정 살펴…미공개작들도 첫선
최유현 자수장의 작품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자수(刺繡)는 오랫동안 여성의 취미 정도로 취급받으며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 영역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자수는 규방 자수에 머물지 않고 공교육과 전시를 통해 미술공예로 거듭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지난 1일 개막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시대 흐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해 왔지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 자수의 다양한 면모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는 흔치 않은 전시다.
옷이나 침구, 주머니나 보자기 등 일상용품을 장식하는 용도였던 자수가 전시를 통해 공개적으로 선보이게 된 것은 1893년 미국에서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전시에는 당시 조선이 출품했던 보료와 방석을 볼 수 있다. 도화서 화원이 그린 밑그림에 수방(繡房)의 궁녀들이 수를 놓은 궁수(宮繡)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미국 필드 자연사박물관 소장품을 빌려왔다.
자수는 병풍으로도 제작됐다. 전시에 나온 19세기말 '자수 준이종정도(尊彛鐘鼎圖) 병풍'은 고대의 청동 제기를 금색 명주실로 섬세하게 수놓은 작품으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2m가 넘는 이 병풍은 명성황후 집안이 소장하다 1974년 주한일본대사관 직원에게 넘어갔던 것을 1991년 재일교포 역사학자 신기수가 구입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현재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이 소장하고 있다.
덕수궁에서 만나는 자수의 세계 |
자수를 제작한 것은 주로 여성들이었지만 평안도 안주의 안주수(安州繡)는 남성 자수 장인들이 주로 제작했다. 안주수는 실을 여러 번 꼰 '꼰사'를 사용하는 한국 자수 중에서도 특히 꼬임이 강해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제작자 이름을 알 수 없는 대부분의 옛 자수 작품과는 달리 장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안주수의 특징이다. 안제민의 불교자수 작품과 양기훈(1843∼1911)이 원화를 그린 '자수 송학도 병풍' 등이 안주수 작품으로 소개된다.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딸이나 손녀에게 전수하던 자수는 공적 교육 영역에 포함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공예부가 생기며 '미술공예'로 발전했다. 특히 일본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조시비. 女子美)의 자수과 출신 여성들이 귀국해 전통 자수와는 전혀 다른 자수를 보급했다. 이 학교에서는 그림 같은 자수를 가르치며 밑그림도 자수를 놓는 사람이 직접 그리도록 교육했다. 한국 자수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박을복(1915∼2015)과 나혜석의 조카로도 알려진 나사균(1913∼2003)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전시에서는 조시비에서 자수를 배운 유학생들의 습작, 졸업 작품 제작을 위해 그린 밑그림과 관련 자료들을 소개한다. 윤봉숙(?∼1947)이 금색 비단 위에 수를 놓은 1938년작 '오동나무와 봉황'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된다.
자수의 기술, 자수의 예술 |
활짝 핀 등나무꽃 아래 한 쌍의 공작이 노니는 장면을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한 '등꽃 아래 공작'은 가로 3.4m, 세로 2.1m의 병풍이다. 숙명여고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역시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자수 분야는 해방 직후인 1945년 이화여대에 자수과가 생기며 조시비 자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자수과 1회 졸업생인 김혜경의 졸업작품 '정야'는 당시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인승이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책을 읽는 여성을 표현했다. 보는 각도와 조명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는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 개최 |
자수 분야에서도 당시 미술계 흐름과 비슷하게 추상 작업이 등장한다. 1950년대 반(半)추상에서 1960년대 이후에는 완전한 추상까지 발전한다. 1967년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공예부 문교부장관상 수상작인 송정인(87)의 '벽걸이'나 제22회 국전 입선작인 '작품 O-3', 김인숙의 '계절3' 등에서 1960∼1970년대 추상 자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전에 전시된 송정인의 '작품 O-3'(1973). 2024.5.2 zitrone@yna.co.kr |
이화여대 자수과가 1981년 섬유예술과로 통합된 것은 아카데미에서 자수의 위상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아카데미 밖에서 자수는 수출용 산업공예로, 또 보존해야 할 전통공예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 조선 자수를 연구·보전하려는 노력도 시작됐다. 박영숙과 허동화는 1960년대부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웠고, 1984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이 처음으로 지정됐다.
눈이 즐거운 자수의 디테일 |
자수장으로 처음 지정된 한상수(1935∼2016)와 최유현(88) 자수장 보유자의 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다. 특히 전시장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작품인 '팔상도'는 양산 통도사에 있는 팔상도(부처의 탄생부터 열반까지 과정을 여덟 장면으로 압축해 표현한 그림)를 최유현 보유자가 이수자들과 함께 10여년에 걸쳐 자수로 옮긴 것이다. 형상을 충실히 재현한 동시에 선명하고 화려한 색감이 두드러지는 대작으로, 엄청난 공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전시는 8월4일까지. 유료 관람(덕수궁 입장료 별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 개최 |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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