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연휘선 기자] 보호받지 못한 교사의 비극, 그 속에 교육 당국의 책임 회피가 엉뚱한 곳에 불똥으로 튀었다. 서초 교사 사망 사건의 책임에 정신건강의학과의사 오은영이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시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담임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20대 사회 초년생인 현직 교사가 학교에서 사망한 비극이라니. 전국이 떠들썩해졌고 대중의 연민과 비통함이 끊이질 않는다. 자연스레 책임 소재를 따지는 시각이 생겨났고 이 가운데 오은영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했다. 미디어에서 보여준 그의 육아관이 현실에서 교권의 추락을 야기했다는 이유에서다.
# 국민 멘토의 탄생
오은영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지난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방송됐던 SBS 프로그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통해서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오은영이 상황 별 다양한 육아의 해법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이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부모를 때리던 문제적 아이가 오은영을 만나 짧은 시간 안에 바뀌는 모습이 경탄을 자아내며 방송 내내 사랑받았다.
이후 2020년부터는 유사한 포맷의 채널A 프로그램 '금쪽 같은 내새끼'가 등장했다. 2021년부터는 스핀오프 격으로 미성년 자녀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금쪽이들의 멘탈까지 케어하는 채널A '금쪽상담소'나 부부 고민을 상담하는 MBC '오은영 리포트' 시리즈까지 오은영의 예능 출연이 확대됐다. 이에 오은영은 육아 멘토를 넘어 '국민 멘토' 격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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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영 육아'가 뭐길래
그 와중에 그가 꾸준히 강조해온 점은 소위 '기질 육아'로 불리는, 아이의 기질에 맞춰 보호하고 훈육해야 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비쳤다. 아이의 성향에 따라 주양육자인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것. 때로 미디어에서 오은영의 방식은 부모의 권위보다 아이를 우선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했다.
서초 교사 사망 사건의 책임으로 오은영 박사를 지적하는 이들은 일련의 '오은영 식 예능'으로 말미암은 육아로 자녀 훈육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잘못된 육아관을 갖게 된 학부모들이 교사의 권위와 권한에 도넘은 간섭을 하며 소위 갑질을 일삼았고, 그 폐단이 쌓여 이번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100명의 아이 100명의 해법...똑같은 건 방송 포맷
그러나 10년이 넘는 방송 기간 동안 오은영이 미디어를 통해 꾸준히 보여온 문제 상황들에 대한 해법은 단순히 '기질 육아'나 부모의 변화 만으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긴 시간 만큼 그 방식에는 유형 별로 해결 방식도 무수히 다양했다.
물론 그가 출연한 방송들이 소위 '금쪽이'로 대표되는 문제적 아이들이 등장하고, 문제 이유 대부분이 부모의 잘못된 육아가 있었기에 아이가 아닌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로 귀결되는 구성을 취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이는 제한된 시간 안에 훈육, 아이의 행동 교정 등을 풀어내야 하는 효과적인 연출 방식이었을 뿐. '오은영식 육아'의 모든 부분에서 부모의 권위보다 자녀가 우선됐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때로는 주양육자의 권위가 강조되기도 했고, 오은영은 만3세 이상의 자녀에게 올바른 훈육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만약 이 같은 전달 방식이 문제라면 오은영 예능의 구성을 바꾸지 못한 방송가의 게으름을 탓하는 게 맞다. 실제 2006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첫 방송부터 '금쪽 같은 내새끼'가 방송 중인 현재 2023년까지, 무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은영 방송의 구성은 주위 출연자와 사례만 달랐을 뿐 큰 차이가 없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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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 인권VS학생 인권' 아냐
서초 교사 사망 사건은 단지 '오은영'으로 대표되는 특정한 육아 방식이나, 학생 인권의 상승 효과 만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없는 비극이다. 추락한 교사의 권위, 사라진 교사들의 인권은 교육당국이 그 구성원을 보호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데에서 비롯됐다. 교사를 학습을 위한 기능적인 존재라거나 학교의 소모적인 구성품으로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 한 무너진 교권은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보호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교사의 인권이나 학생의 인권은 서로 대척점에 선 경쟁 관계가 아니다. 교사를 인격체로 보지 않는 저변에는 이미 학생 또한 보호, 양육해야 할 미래 세대가 아닌 인적 자원으로만 보는 사고가 깔려있다. 그 안에 교사는 엘리트 자원을 길러낼 공교육의 부품일 뿐이다. '교사 인권VS학생 인권'이라는 경쟁적 인식이 강해질수록 어느 쪽이든 보호의 필요성도 소모된다. 결국 어느 한쪽의 높낮음이 아니라 방향성을 잃은 시스템의 결함이다. 구조의 문제는 어느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 욕받이 물타기 그만
일련의 사태에 작가 겸 방송인 허지웅은 "교권이라는 말은 교실에서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따로 존재하고 서로 상생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전제한다. 인권은 나눌 수 없다. 인권은 누가 더 많이 누리려고 애쓸 수 있는 땅따먹기가 아니다. 그런 잘못된 말의 쓰임과 인플레가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과거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당했던 폭력과 부조리를 정상으로 애써 돌려놓았다면, 그간 악습으로 위태롭게 눌러왔던 것들을 원칙과 절차를 통해 규제할 수 있는 엄정한 도구 또한 함께 고민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룰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라며 "보나마나 서로 탓을 돌리는 공방이 이어질 거다. 저는 남탓을 하기보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결과물을 가지고 나올 쪽에 서겠다"라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언제라도 납득하기 힘든 비극은 책임 소재를 따지게 한다. 그렇다고 이번 비극이 오은영 박사의 머리채를 잡아서 끝날 일은 아니다. 또한 비극의 장소가 학교라고 해서 억지로 감추며 회피하기 보다는, 황망한 죽음에 대한 충분한 애도가 먼저다. 그 슬픔을 추스른 힘이 있어야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도 만들 수 있다. 그 전에 '오은영'이라는 욕받이를 앞세운 물타기에 당해선 안 된다. / monamie@osen.co.kr
[사진] OSEN DB, 채널A 제공,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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