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꺾마’라는 문구의 원조인 프로게이머 데프트(김혁규). 11월 열리는 롤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다시 한번 도전장을 던졌다. 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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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꺾마’라는 말이 이 정도까지 퍼질 줄 몰랐어요. 어디까지 갈지 무서워지더라고요. 언어의 사회적 영향력을 실감했죠. 손흥민 선수가 저를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 말이 멋있게 포장된 그 문구가 힘이 됐다고 하니 뿌듯하네요.”
지난해 12월 카타르월드컵 16강에 오른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문구는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였다. 그 말의 원조인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의 프로게이머 데프트(27·본명 김혁규)를 지난 19일 서울 영등포구 디플러스 기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난해 10월~11월 미국에서 열린 롤드컵(월드 챔피언십) 당시 ‘국내 4번 시드’ DRX의 데프트는 16강 그룹 스테이지 첫 경기에서 진 뒤 “무너지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매체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제목을 달아 그의 말을 소개했다. DRX는 결국 그 대회에서 플레이 인 스테이지를 시작으로 결승에서 페이커의 T1까지 연파하며 ‘올 업셋(하위팀의 반란)’ 우승을 이뤄냈다.
축구대표팀 조규성(오른쪽)과 권경원이 카타르월드컵 16강행 확정 후 팬이 건네준 중꺾마가 적힌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 대한 축구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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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 달 뒤 카타르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 공격수 조규성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문구가 쓰인 태극기를 들었다. 손흥민은 “너무나도 멋있는 이 말이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데프트는 “한국 축구의 16강 진출 확률이 9%였는데 우리 팀도 우승 확률이 0.001%도 되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력상 밀리는 포르투갈에 원 사이드하게 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선수들이 말도 안되게 너무 잘했다. ‘이게 언더독(약체)을 응원하는 재미고, 우리 팬들도 이런 마음으로 보셨겠구나’ 감정 이입이 됐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우승한 뒤 수험생·취준생은 물론 병마와 싸우는 분들이 ‘큰 힘이 됐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했다. 데프트가 롤드컵에서 우승한 건 2013년 데뷔 이후 10년 만이자 3505일 만이었다.
“2020년과 21년에 허리 디스크 증세를 겪었어요. 하루에 최대 15~16시간 연습에 시간을 때려 박는 스타일이었죠. 누군가 ‘쟤 데리고 롤드컵에서 우승할 수 없다’고 의심했는데, 한 해 씩 지날 때마다 반박할 수 없더라고요. ‘당신이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었어요. 10년간 항상 실패했지만, 제가 가는 방향이 맞는다는 신념 만은 꺾지 않았습니다.”
DRX 데프트와 T1 페이커. 두 사람은 1996년생 동갑내기로, 서울 마포고등학교 동문이기도 하다. 사진 라이엇게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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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트는 ‘e스포츠 메시’라 불리는 페이커(이상혁)와 서울 마포고 동문이지만, 학창 시절 반이 달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데프트는 “학교에서 ‘롤 일등, 이등이 있다’는 얘기 정도만 들었다. 우리 팀과 만나지 않을 땐 ‘잘했으면 좋겠다’고 응원한다”고 했다. 데프트와 페이커 둘 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데프트는 “공무원인 엄마가 처음엔 ‘밥벌이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대학 합격 직후라 신뢰 받던 두살 위 친형이 저의 게임 재능을 알아채고 엄마를 설득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에 DRX에서 디플러스 기아로 이적한 그의 연봉은 약 30억원으로 추정된다.
17세 때 지은 그의 닉네임 ‘데프트(deft)’는 ‘날렵하다’는 뜻이다. 먼 거리에서 공격하는 ‘원거리 딜러(원딜)’로 초반엔 약하지만, 잘 성장하면 화력이 엄청 강해진다. 21세 이상의 ‘원 딜 ’우승자가 없을 만큼, 스킬을 피하고 치고 들어가는 피지컬 능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포지션이다. 아무래도 어릴수록 유리한 편인데 데프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우승을 이뤄냈다.
김혁규가 팬이 선물해준 알파카 인형을 들고 있다. 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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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부터 2년간 중국 EDG에 몸담는 등 총 6팀에서 수많은 패배를 당하며 쌓아온 경험 덕분이다. 순한 동물 알파카를 닮아 별명이 ‘알파카’인 데프트는 “kt 시절 팀원들과 홍천에서 알파카를 본 적이 있다. 귀여우면서도 사납게 생겼더라”며 웃었다. 그는 만화 슬램덩크의 ‘안선생’처럼 평소엔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한 번 눈빛을 쏘면 후배들이 따르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녔다. 데프트는 “리더는 존경 받을 만한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위기 때 나도 마음이 꺾일 뻔했지만 멀쩡한 척 한 적도 있다. 롤에 대한 진심도 중요하다”고 했다.
2022 LoL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DRX 데프트(김혁규)가 트로피에 키스하고 있다. 사진 라이엇게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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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롤드컵은 오는 10월~11월 서울과 부산에서 열린다. 올해 국내리그 LCK 스프링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디플러스 기아는 다음 달부터 약 3개월간 열리는 LCK 서머와 한국 선발전을 통해 한국 팀에 주어진 롤드컵 티켓 4장을 노린다. 데프트는 “우리 팀은 초반부터 스노볼을 굴리는 조합을 선호하지만, 최근엔 후반 전투로 뒤집는 단단한 조합을 잘하는 팀들의 성적이 좋다. 지난 6개월 동안 팀원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 파악했다. 앞으로 남은 반 년 동안 좋은 결과를 내야 지나온 시간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롤드컵 당시 팬들은 데프트를 향해 ‘라스트 댄스’ 대신 ‘The Dance Lasts(춤은 계속 된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했다. 결국 그는 낭만 가득한 ‘소년 만화’처럼 해피 엔딩을 이뤄냈다. 데프트는 “작년엔 ‘이번이 마지막 롤드컵이다. 안되면 은퇴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올해 롤드컵에 출전해 또 한 번 ‘소년 만화’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중꺾마의 원조 데프트. 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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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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