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고마르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 소장 인터뷰
프랑스의 권위 있는 국제관계학자인 토마 고마르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IFRI) 소장이 지난달 10일(현지시간) 파리의 집무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제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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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무트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동남부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 사이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서방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과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전쟁 이후의 세계’를 파악하려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토마 고마르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IFRI) 소장은 지난달 10일(현지시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2년째 이어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핵무기를 확보한 국가가 벌이는 식민주의적 전쟁으로, 과거에는 없던 사태”라고 정의하면서 “러시아의 의도대로 전쟁이 종결될 경우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힘 있는 국가는 힘이 약한 이웃 국가를 맘대로 유린한 후 전쟁 종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타협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고마르 소장은 소련·러시아의 외교정책을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자 지정학 전문가이다.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 유럽연합(EU)안보연구소 등을 거쳐 2015년부터 IFRI 소장을 맡았다. 러시아, 중국, 튀르키예 등 주요 패권국들의 지정학 전략과 향후의 세계정세를 분석한 <드러나지 않은 야망(Les ambitions inavouees)>을 지난 1월 출간했다.
지난 1월 출간된 후 프랑스에서 화제가 됐던 토마 고마르 소장의 저서 <드러나지 않은 야망: 강대국들이 하는 일>. |
그는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화가 끝났다’는 진단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국가가 중심이 돼 주도권을 갖는 세계화의 모습으로 변환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푸틴, 핵무기 앞세우며 협박
핵의 전쟁 억지 원리 허물어
‘서방’ 핑계 대는 건 안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서방의 군사지원 방안이 발표될 때마다 핵 위협 발언을 했다. 핵 위협에 대한 대응책도 있나.
“러시아는 핵무기를 확보한 상태에서 식민주의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없었던 사태이다. 푸틴은 핵무기 위협 발언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핵 공격을 군사외교적 수사로 내세우면서 핵이 없는 이웃 나라를 협박하고 있다. ‘핵무기의 전쟁 억지론’ 범주에서 벗어나, 공격적 작전을 벌이기 위해 핵을 수사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2월28일 프랑스군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프랑스·미국·영국 등 서방 3국이 핵무기의 전쟁 억지 차원에 얼마나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모스크바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랑스가 그럴 수 있는 군사적 전력을 갖추고 있음을 강하게 상기시킨 것이다.”
-핵 공격에는 핵 공격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마크롱의 발언은 푸틴의 핵무기 위협에 대응해 우리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모스크바가 핵무기 사용을 협박용으로 거론하는 것은 결국 핵의 전쟁 억지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인 만큼, 마크롱은 푸틴에게 핵무기 전쟁 억지 원리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핵무기의 전쟁 억지 원리란 우리도 한편으로는 이 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상대에게 상기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식으로 경고·협박하는 것은 아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서방과의 대리전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가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3개국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국가들은 우크라이나가 정당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무기 지원을 하고 있을 뿐이다. 푸틴은 특수군사작전이라는 말을 내세워 전쟁을 벌이면서 자신이 서구 집단이라 부르는 대상을 설정하고 지극히 적대적인 언설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전쟁은 이미 9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 전쟁의 촉발점은 러시아의 크름반도 강제병합이다. 국제법상 러시아는 합법성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핵무기를 가진 국가가 핵무기가 없는 이웃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모두가 예측한 바와 달리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저항은 훨씬 컸고 전세는 러시아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협상엔 당사국의 의지 필요
러·우크라, 타협 동력 없어
잘못하면 가해국 편 드는 꼴
-헨리 키신저 등 러시아를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국제정치학자도 있다. 이 전쟁에서 피해야 하는 최악의 결말은 무엇일까.
“키신저가 제안한 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들이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아내야 하는데,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어느 쪽도 타협의 모티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양국이 정치적으로 타협하려면 협상할 시간도 확보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현 상황에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러시아의 의도대로 그들이 전쟁의 우위를 선점한 상태에서 전쟁이 종결될 경우 국제정치사에서 하나의 판도라 상자를 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힘이 있는 국가는 아무런 제재 없이 힘이 약한 이웃 국가를 맘대로 유린한 후 전쟁 종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타협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중동 포함한 전선
지역 패권국 영향력 읽어야
-최근 출간한 <드러나지 않은 야망>에서 우크라이나 전쟁뿐 아니라 지역 패권국들이 얽혀 있는 세 개의 전선에 대해 언급했다. 어떠한 전선들이 형성돼 있는가.
“첫 번째 전선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군사적 갈등이 빚어내는 전선이고, 두 번째는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불안이다. 여기에는 남북한 양국에 일본, 미국까지 복잡하게 얽힌 전선이 형성돼 있다. 세 번째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이란과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갈등인데, 중동 지역에서 형성된 이 폭발성 높은 전선에도 미국, 러시아, 중국까지 얽혀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전선이 가져다주는 지정학적 변화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라시아에 형성된 이 세 가지 전선의 갈등이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 미치는 영향의 다양한 양상을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 세 전선 모두에 미국이 깊이 얽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전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러시아와 중국은 지난해 2월4일 공동성명을 통해 ‘무제한적 우정’의 관계를 선언했다. 현재 러시아와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국제제재를 받고 있는 국가이면서, 양국 모두 에너지 분야에서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역시 전쟁에 깊이 관여되어 가는 중이다. 북한이 러시아에 탄약 등을 공급하고 있고, 한국은 폴란드에 전차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은 드론과 같은 무기를 러시아에 공급하는 중이다.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국제 역학관계를 변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국가 중심성’이 더 강조될 뿐
‘세계화’는 중단되지 않을 것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화의 종식’이 이뤄질 것이란 진단에 동의하나.
“동의하지 않는다. 소련 해체로 1991년 얄타협정(영국·미국·소련이 1944~1945년 맺은 2차대전 패전 처리 협정)에 기원을 둔 국제 체제가 붕괴했다. 이후 진행된 세계화는 국경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국제 교역이 활성화되고, 세계 경제가 금융 중심으로 구조화된 것 등으로 특징 지워진다. 앞으로도 자원의 교역과 인적 교역은 여전할 것이므로 세계화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의 세계화는 앞으로 국가가 중심이 되는 세계화로 대체될 것이다.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축소되고, 이제는 국가들이 주도권을 갖는 세계화의 모습으로 변환될 것이다.”
글·사진 파리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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