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린
안나린 선수가 29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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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가장 촉망받는 프로골퍼 중 한 명은 안나린(26)이다. 지난해 12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퀄리파잉(Q)시리즈를 수석으로 통과했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 만에 치러진데다 골프천재들이 대거 참가한 이 대회에서 마지막 날 6언더파를 몰아쳐 역전 우승했다. 최근 안나린을 만나 LPGA 데뷔 심경을 들었다.
안나린은 어린 시절 여행을 자주 다녔다. 아버지가 항공사 엔지니어인 덕분에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많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직업을 갖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LPGA투어 선수가 돼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겠다고 결심했다. 11년이 지나 그 꿈이 이뤄졌다. 지난해 12월 안나린은 8라운드로 펼쳐져 ‘지옥의 라운드’로 불리는 Q 시리즈를 당당히 1등으로 통과해 올 시즌 출전권을 얻었다.
■ 천재들이 참가한 2021년 LPGA Q시리즈
우승 안나린
2위 폴린 루생-부샤르(아마추어 34주간 랭킹 1위)
3위 아타야 티티쿨(유럽 투어 4승 등 10승)
7위 후루야 아야카(2021 JLPGA 투어 대상)
8위 최혜진(KLPGA 3년 연속 대상 수상)
그의 미국 진출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중학생 안나린이 꿨던 꿈의 실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기 때문이다. 보통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골프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나린은 운동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잔디밥’(골프를 친 시간)은 중요하다.
환경도 좋지 않았다. 1996년 1월생 안나린은 1995년생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고진영·김효주 등이 1995년생, 한국 여자골프의 황금세대다. 중학생 때부터 실력이 뛰어난 동료들이 많았다. 뒤처져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쫓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이 더 무겁다.
안나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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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린은 이겨냈다. 6년 만인 2017년 KLPGA 1부 투어 선수가 됐고, 2020년에 2승을 거뒀다. 2021년엔 우승이 없었다. 안나린은 “운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 이미정 씨는 “갈비뼈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안나린은 세상을 여행하는 직업을 얻었다. 그러나 관광객처럼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는 스타일이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목표”라고 말했다.
안나린의 캐디백. 웨지와 퍼터 능력은 LPGA 투어에서도 정상급이라는 평을 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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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쉽지 않은 목표다. LPGA 명예의 전당 입성은 모든 스포츠 종목 중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다. 2007년 이후 15년 동안 LPGA 투어 명예의 전당 입회자는 박세리와 박인비밖에 없다.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는 20대 중반, 안나린은 도전을 시작한다.
그러나 안나린이니까 가능할 수도 있다. 안나린은 “어렵다는 건 알지만 나를 믿는다. 나의 최정점이 100이라면 지금 실력은 50 정도라고 본다. 아직 발전할 부분이 많다. 늦게 시작했으니까 그만큼 오래 갈 수 있다”고 했다.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연상된다. 소렌스탐은 25세인 1995년 LPGA 투어 첫 우승을 하더니 38세까지 72승을 거뒀다.
안나린의 장기는 쇼트 게임이다. 그의 매니지먼트사인 세마의 홍미영 상무는 “웨지는 대부분 홀 1m 이내에 붙이고 퍼트는 실수가 거의 없다. LPGA 투어에서도 최정상급일 것”이라고 했다.
정신력도 강하다. KLPGA 첫 우승은 아슬아슬했다. 최종라운드를 10타 차 선두로 시작했으나 후반 유해란의 맹추격에 2타차로 쫓기기도 했다. 안나린은 “평소 경기할 때의 긴장감 정도였다. 언젠가 우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떨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그의 가장 큰 강점은 도전을 즐기는 거다. 안락한 국내 투어를 두고 정글로 떠나는데 두려움이 없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누구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고 했다.
LPGA 투어에 가면 다양한 잔디를 만나게 된다. 안나린은 “Q 시리즈 대회장의 버뮤다 그린에서 연습해 보니 결이 워낙 강해 공이 구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조금만 결을 타면 방향이 확 바뀌더라. 그러나 연습하면서 어떤 느낌으로 해야 할지 알게 됐다. 미국 서부에서 보게 될 포아애뉴아 잔디는 울퉁불퉁하다더라.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 이를 통해 배워가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여행이 안락하지만은 않다.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세상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LPGA 투어에서는 빡빡한 비행기 시간에 짐을 트렁크에 욱여넣고 이동해야 할 정도로 바쁜 일정이 잦다. 비행기 연착으로 공항에서 자야 할 때도 있다. 안나린은 “일부러 오지로 캠핑을 가기도 하니까, 그런 어려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어려울수록 더 재미있다고 여긴다. 안나린은 어릴 적 태권도를 배웠다. 그는 “대련할 때 무섭기는커녕 신이 났다. 어떻게 해야 이길까, 어떤 기술을 쓸까 등을 생각했다. 맞으면 때리고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했다. 안나린은 골프에서도 어려운 코스를 좋아한다. 그는 “러프가 길고, 그린이 딱딱한 US여자오픈이든, 강풍이 부는 브리티시 여자오픈(AIG오픈)이든 정신만 차리면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이 불평하는 악조건에서 내가 더 유리할 수 있다”고 했다. 잭 니클라우스와 브룩스 켑카가 그랬다. 메이저 우승이 유달리 많은 선수다.
■ 안나린은
생년월일: 1996년 1월 5일
신장: 167cm
KLPGA 우승: 2회
세계랭킹: 61위
장기: 칩샷, 퍼트(2021년 KLPGA 투어 라운드 평균 퍼트 수 2위)
좋아하는 선수: 타이거 우즈
안나린은 타이거 우즈를 좋아한다. 전성기 우즈는 마치 호랑이처럼 혼자 다녔다. 다른 선수들이 한 조에서 경기할 때 편안하게 느낄까 봐 곁을 주지 않았다. 안나린도 일반인 친구는 많지만, 투어에서 특별히 친한 선수가 없다. 그는 “연습 루틴이 깨지는 게 싫다. 누구를 기다렸다 가거나 누구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부담된다”고 했다.
필드에선 맹수의 DNA를 가졌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의류 스폰서 보그너의 김기열 전략기획실장은 “안나린은 평소 말이 없는 성격인데 이벤트 촬영 때 어린아이들에게는 매우 자상했고, 어른들에겐 매우 싹싹하게 행동해 놀랐다”고 말했다.
안나린은 11일 미국으로 떠나 27일 플로리다주에서 열리는 게인브릿지 LPGA에 출전한다. 안나린의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 구옥희 한국인 첫 우승…‘맨발 투혼’ 박세리 등 23시즌 중 13번 신인왕
1985년 가을 구옥희는 미국으로 건너가 LPGA 투어 Q스쿨(이듬해 출전권이 걸린 대회)을 치러 10위로 합격했다. 구옥희는 이듬해 메이저대회인 LPGA 챔피언십에서 12위, US여자오픈에서 14위 등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첫 우승은 3년 차인 88년 핑 레지스터에서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LPGA 우승이었다.
LPGA 투어에 진출한 한국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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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박세리는 Q스쿨 수석 합격의 영광을 안았고 이듬해 US여자오픈에서 ‘맨발의 투혼’으로 우승하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김미현은 99년 박세리에 이어 2년 연속 한국 출신 신인왕이 됐다. 이후 한희원과 박지은, 장정, 박희정 등 30여명의 선수가 LPGA 투어에서 뛰었다. 안시현은 2003년 제주에서 벌어진 CJ 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우승했다. 안시현은 이 우승으로 그 어렵다는 Q스쿨을 거치지 않고 LPGA 투어에 진출, ‘신데렐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안시현은 Q스쿨 없이 LPGA 투어에 간 첫 한국 선수다.
2007년부터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구옥희가 LPGA 투어에서 처음 우승한 88년에 태어난 한국의 소녀들은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98년 본격적으로 골프에 뛰어들었고 2007년에 박인비와 김인경을 시작으로 LPGA 투어에 입성했다. 2008년엔 최나연, 2009년에 신지애가 LPGA 투어에 합류했다. 신지애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2015년에는 역대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한꺼번에 LPGA 투어에 진출했다. 김효주, 김세영, 장하나, 백규정 등이다. LPGA 투어에선 2000년대 초반에 이은 ‘(한국의) 2차 침공’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선수들이 큰 활약을 했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전인지와 박성현은 각각 2016년과 2017년 메이저리그 격인 LPGA 투어에 진출했다. 고진영은 2017년 국내에서 벌어진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전인지, 박성현과 챔피언조에서 승리해 미국행 티켓을 땄다.
한국은 1998년 이후 23번의 시즌 중 13번 신인왕을 냈다. 특히 2015년 이후엔 김세영을 시작으로 2016년 전인지, 2017년 박성현, 2018년 고진영, 2019년 이정은이 5년 연속 신인상을 탔다. 그러나 국내 투어가 커지고, 코로나19로 인한 이동의 어려움 때문에 유망주들의 LPGA 투어 진출은 잠시 주춤했다. 2021년 LPGA 투어에 간 한국인 신인은 김아림 혼자였다.
올해 다시 바람을 타고 있다. Q시리즈에서 수석 합격한 안나린은 최혜진, 홍예은 등과 함께 LPGA 투어에서 2022년을 시작한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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