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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2' 정치 깡패 이정재…정치와 폭력이 만난 최악의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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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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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정치 깡패 이정재가 꿈꿨던 것은?

24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정치깡패 이정재'가 탄생한 그날의 이야기를 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김동현, 류현경, 김용명이 이야기 친구로 등장해 장트리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야기는 1953년 8월의 동대문에서 시작됐다.

아는 동생 이 회장을 만나기로 한 37살의 이성순은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고등학생 10여 명과 시비가 붙었다.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고등학생들은 이성순의 주먹에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고등학생이라고 할지라도 건장한 남성 10여 명을 상대로 단숨에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그에게는 가능했다. 그는 바로 동양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였던 것.

시라소니는 그들을 뒤로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신을 만나기로 한 이 회장은 온데간데없고 사무실에 있던 20여 명의 남자들은 손도끼, 갈고리, 쇠파이프 등을 들고 시라소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시라소니는 역시 달랐다. 그는 주먹 하나로 20여 명의 남자들을 금방이라도 때려눕힐 기세였다.

그러나 그때 시라소니가 전화선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전세는 역전됐다.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그에게 시비를 걸던 이들부터 사무실의 20여 명의 남자들은 모두 이 회장의 기획으로 시라소니를 치기 위해 함정을 팠던 것.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라 불린 이 날의 집단 폭행으로 시라소니는 목숨을 잃었다. 이에 시라소니의 아들은 "가마니에 싸서 청계천에 버렸다. 온몸이 다 도끼에 찍혀 붓고 갈고리에 찍혀서 뼈마디가 부러졌다.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마나 처참했는지 그건 말로 할 수 없다"라며 대한민국 주먹계 역사상 없던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시라소니 린치 사건의 기획자 이 회장은 국대급 체격의 동대문파의 수장 이정재 회장. 당시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공무원의 인사에도 관여했을 정도로 실세였던 것.

경기도 이천의 씨름선수 출신인 그는 180센티미터의 키에 힘이 장사였다. 그리고 그는 힘뿐만 아니라 영특한 것이 강점이었다. 명문고를 졸업하고 천석꾼 집안의 금수저 이정재. 그의 첫 직장은 주먹계였다.

당시 학교는 주먹 영재 발굴단이었다. 이에 소위 인텔리 주먹들이 탄생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정재였다. 힘 좀 쓴다는 청년들이 주먹계에 대거 유입됐던 시기, 이 시기는 1대 1로 맞짱이 기본이 되던 낭만 주먹시대로 낭만주먹 대표주자는 김두한과 시라소니였다.

조직을 이끌던 두목 김두한과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시라소니. 특히 김두한은 시라소니의 실력을 알아보고 그를 인정하며 평생 형님으로 모시며 함께 시대를 보내어 두 사람의 맞대결은 성사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이정재는 이들과 겸상도 못하는 한참 후배 격으로, 실제로 그를 주먹계에 데뷔시킨 것이 김두한이었다. 그리고 김두한은 그때 몰랐다. 본인이 키운 것이 호랑이 새끼라는 것을.

이정재와 시라소니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던 걸까? 힘만 셌지 싸움은 잘 못했던 이정재, 그는 한국 전쟁 부산 피난 시절 건달들에 두드려 맞고 있던 것을 시라소니가 구해주며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모셨던 것.

그런데 시라소니는 매번 이정재에게 돈을 요구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파 공작 첩보부대 교관 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이북 출신 대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후배들에게 손을 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요구는 점점 늘어났고 이에 이정재는 시라소니에 대한 마음이 점점 변해갔던 것.

이에 시라소니를 치려고 마음먹은 이정재는 궁리를 했다. 당시 낭만주먹 시대는 1대 1 싸움만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시라소니에 1대 1이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이정재는 "1대 1로 안되면 떼로 덤비고, 주먹으로 안되면 연장 들고 까버리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시라소니 린치 사건을 꾸몄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낭만주먹 시대는 막을 내리고 집단 폭행의 시대, 깡패 시대가 열렸다. 당시 국회의원이 되어 주먹계를 떠난 김두한, 그리고 시라소니는 제거했으니 단숨에 이정재가 1인자가 됐던 것이다.

이정재는 권력은 주먹이 아니라 조직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갖고 조직을 만들어 조직을 키워갔다. 이에 그의 조직의 조직원들이 가장 많았을 때는 3천 여명으로 대기업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정재는 자신만의 철칙을 갖고 조직을 운영해갔다. 또한 그의 뒤에는 그의 모든 행위에 근거가 되는 뒷배가 있었다. 이정재의 배후는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이기붕.

이승만의 비서로 출발해 후계자로 발탁된 그는 국회의장을 거쳐 장관까지 오르지만 무능하고 인기도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에 이기붕은 이정재를 찾아가 반대파 처리를 부탁했고, 그렇게 이기붕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물고 놓지 않는 종로의 부루덕(불독) 정치 깡패 이정재가 탄생한 것이다.

이정재는 헌법 개정을 위해 부하들을 데리고 국회로 들어가 국회의원들에게 협박과 공갈, 폭력까지 휘둘렀다. 그리고 정부에 반하는 세력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 달려가 무력으로 이를 방해했다. 뒷배가 든든하기에 경찰도 무엇도 두렵지 않았던 이정재와 부하들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거칠어졌다.

급기야 이정재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김두한에게 총까지 겨누었다. 백주 대낮에 국회에서 국회의원을 향해 일개 깡패가 권총을 겨누었던 것. 위계질서도 룰도 무시하고 안하무인이었던 이정재는 이 사건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이정재는 조직원들과 함께 선거 공작에 나섰다. 상대 후보의 출마를 막기 위해 선관위 앞에서 퍽치기를 하고 선관위 공무원을 매수하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마 자체를 저지했다.

또한 깡패들이 마을을 돌며 이장들에게 특정 후보를 찍으라 지침을 내렸고, 이에 주민들은 조를 이뤄 서로를 감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투표소 앞을 깡패들이 점거해 소신 투표를 어떻게든 막았다.

또한 4할 사전투표로 상상할 수 없는 부정 선거를 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던 이정재는 정치가 우스워졌고 급기야 대통령을 꿈꾸며 국회 입성을 계획했다. 그는 고향 이천에서 국회의원이 되고자 민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1958년 민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런데 복병이 등장했다. 복병은 바로 이정재의 뒷배 이기붕.

이기붕은 "건달이 무슨 정치야. 동대문 시장이나 신경 쓰지"라며 그를 무시했고 본인이 이천에서 출마하겠다 일렀다. 2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이기붕은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고 안전한 곳을 찾다 이천을 선택한 것.

배신당한 이정재는 결국 "이기붕 선생이 이천을 택하시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저는 아무 조건 잡념 없이 자진 사퇴입니다"라며 선거를 포기했다. 사실 이기붕이 보낸 경찰들이 옆구리에 총을 들이대고 협박을 했던 것.

이기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야당 후보를 납치해 사퇴까지 시켰고 그는 단독 출마, 무투표로 당선됐다.

앞서 벌어졌던 협박, 폭행, 조작, 매수 등 이 모든 수단이 총동원된 선거가 바로 3.15 부정 선거였다. 이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은 대통령과 부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이로 참고 참았던 민심이 폭발하며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시작됐다. 그리고 마산 사위에 참여했던 17살 김주열 군이 실종되고 27일 만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 위에 떠올라 충격을 안겼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았던 것. 그리고 경찰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김주열군의 시신에 돌을 매달라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는데 시체가 바다 위로 떠오르면 모든 것이 들통난 것이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혁명의 불씨가 됐고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당시 이기붕은 경찰들에게 "총을 쓰라고 준 거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는 망언을 하며 국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라고 했고, 깡패들에 비상 명령을 내려 시위대가 경무대(청와대) 앞으로 오는 것을 막으라고 했다.

김주열 군 시신 발견 1주일 후 고려대 학생 3천여 명 국회 앞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길, 이정재의 부하들이 이들을 폭행하고 이 사건은 다음 날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회사원부터 초등학생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을 향해 정부는 경찰들을 동원해 총격을 가했고, 이에 160여 명이 사망했다. 이른바 피의 화요일이라 불린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이후 이승만은 하야 발표 후 하와이로 망명했고 이기붕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권총 자살을 했다.

체포 후 법정에 선 이정재, 그와 부하들은 재판정에서도 웃으며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재판 결과는 징역 8개월. 실제로 움직인 건 부하들이었기에 대부분의 혐의가 증거 없음 또는 입증 불가였던 것.

이정재는 출소 후 동대문 시장 한가운데 2층 집을 짓고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을 들고 깡패 200여 명의 선두에 서서 덕수궁부터 종로까지 조리돌림을 당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들은 가장 먼저 깡패 소탕에 나섰고, 1만 3천여 명의 깡패들을 잡아들였다. 이에 다시 재판에 회부된 이정재. 혁명 재판이라 불린 이 재판에서 이정재는 사형이 확정, 21일 만에 집행됐다.

죽기 전 이정재는 "저에게 죄가 있다면 어머니에게서 기운 세게 태어난 것뿐입니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부패한 정치의 장난으로 날 유인한 겁니다. 저는 억울합니다"라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와 폭력이 만났을 때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바로 이정재의 생을 통해 드러난 것.

그날의 이야기에 김동현은 "권력과 욕심은 끝이 없어서 자정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 안의 욕망에 대한 적절한 절제와 자각이 필요한 것 같다"라고 말해 공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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