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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연재] 인터풋볼 '최인영 칼럼'

[최인영 칼럼] 한국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故유상철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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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풋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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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풋볼] 골키퍼는 이제 더 이상 기피 포지션이 아니다. 그만큼 현대 축구에 있어서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우리는 골키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터풋볼'이 준비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최초의 무실점 경기 골키퍼이자, 골키퍼의 스타플레이어 시대를 열었던 '레전드' 최인영이 차원이 다른 축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편집자주]

먼저 젊은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난 유상철 감독의 명복을 빈다.

유상철 하면 제일 생각나는 것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대한민국의 첫 승의 골을 기억할 것이다. 필자와 개인적인 인연은 울산 현대에서 코치와 선수로 한동안 함께했다.

당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유상철은 상대 전술에 따라 수비수로, 공격수로, 미드필더로 뛰며 어떤 포지션에서든 제몫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경기에서는 시작은 공격수로 출전해서 득점이후 후반전에는 수비수로 상대팀의 공격을 막아 팀을 승리로 이끈 적도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여러 위치를 맡아가면서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었는가?

첫 번째는 축구선수로 184cm의 좋은 신체 조건을 갖췄다는 것이다. 중앙 수비수나 포드로 출전하려면 기본적으로 헤더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이 조건에 골 결정력을 함께 지녔고 또한 수비력도 좋았고 경기에서 감독의 지시를 하면 더 이상의 추가 지시를 안 해도 경기를 조율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두 번째는 뛰어난 지구력을 가졌었다. 멀티플레이어가 되려면 공격에서 수비까지 활동을 해야 하기에 지구력이 부족하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두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게 훈련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가장 적합한 선수로 유상철이었을 것이다.

유상철은 선수시절 선수간의 언성을 높인 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만큼 친화력이 좋았던 것이다. 고인이 마지막에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팀을 2부 리그로 추락하느냐의 순간에서 팀을 건져 올린 것은 감독으로도 선수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무너져 가는 팀을 다시 올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팀의 조직력이나 선수들이 거의 정신력이 붕괴된 상황이기에 선수들을 다시 치켜세우고 팀의 활력을 일으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경험도 하면서 앞으로 더 훌륭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췌장암으로 잃어버리고 고인이 됐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축구선배로, 또한 함께한 지도자와 선수로, 개인적으로 축구팬으로...

글=최인영(1994년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 골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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