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개 대회서 952라운드 '최다'
발목까지 오는 검정 원피스 차림의 홍란이 드라이버를 들었다. 16년 동안 중단 없이 KLPGA 투어를 지켜온 그는 “투어의 높아지는 위상과 수준을 체감하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
우승을 가장 많이 한 선수, 상금을 가장 많이 번 선수는 영광을 차지하고 이름을 남긴다. 가장 많은 대회에 참가한 선수, 가장 오랜 기간 활약한 선수는? 가치 있는 기록인데도 금방 떠올리기가 쉽진 않다.
스타가 끊임없이 탄생하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34세 홍란은 대회마다 새 역사를 쓴다. 19세였던 2005년 데뷔해 '미녀 골퍼' 소리를 들으며 화려한 시절을 보낸 그는 이제 꾸준함의 상징이다. 올해까지 KLPGA 투어에서만 16시즌 내리 뛰면서 프로 통산 출전 대회 수(323)와 라운드 수(952), 예선 통과 횟수(270)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린다. 한 차례도 투어 카드를 잃은 적 없어 최다 시즌 연속 시드 획득 랭킹도 1위다.
게다가 그는 지난 6월 생애 베스트 스코어(10언더파)를 8년 만에 경신했다(롯데 칸타타 여자 오픈). 최근 서울 한 카페에서 만난 홍란은 "아직 골프를 떠날 때가 아니라고 하늘이 준 신호 같았다"고 했다. "해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투어 수준이 높아져요. 예전엔 파만 하면 괜찮았던 홀에서도 이젠 어떻게든 홀에 붙여야 살아남죠. 여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스스로 항상 돌아보게 돼요."
롱런 비결로 그는 체력 운동을 먼저 꼽았다. "제가 어렸을 땐 골프에 해롭다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속근육 키우고 근육 밸런스 유지하는 운동에 많은 비중을 둬요."
샷 거리 늘리기보다 기초 체력 향상과 부상 방지 목적으로 운동해오다 보니 한동안 쉬어야 할 만큼 크게 다친 적이 없다고 했다. 드라이브샷 거리는 하위권이지만 "더 이상 연습량 늘린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장점에 집중해야죠"라고 했다.
그는 골프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써 왔다. 덕분에 오랜 시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투어 통산 4승을 올린 그는 2008년 그토록 바라던 첫 승을 달성한 직후 혼란에 빠졌다. "다음 대회에 나갔는데 또다시 예선 탈락 걱정이 들더군요. 우승 전과 삶이 달라진 것 하나 없으니 너무 허탈했어요."
'골프=직업'으로 그 나름의 정의를 내린 게 그때였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희망 고문 하고…. 골프에 개입되는 여러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골프는 밀당을 잘해서 내가 주도권을 쥐지 않으면 끌려다녀요." 좋고 싫고를 떠나 '해야 되니까 하는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퇴근' 후엔 골프와 분리된 일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소셜미디어를 공개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일보 |
그에겐 상금 랭킹이 떨어져 투어 카드 잃을 위기에 처했던 2015년이 슬럼프였다. 몇 대회 쉬는 동안 우연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박찬호(47)를 만나 반전의 계기를 얻었다. "선수 생활 하며 얼마나 좋은 일만 많았기에 이 정도 일로 힘들어하느냐"는 일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영광과 좌절의 시간을 통과해온 레전드의 한마디에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시즌 최종전 10위에 올라 투어 카드를 지켜냈다.
오랜 시간 한 우물 파온 홍란에게 '슬기로운 투어 생활' 조언을 구하는 후배도 많다. 멘털 관리, 퍼팅 기술, 돈 관리, 부모와의 관계 등 주제가 다양하다. "예전엔 내가 아는 걸 남들과 나누는 게 싫었어요. 요즘은 '언니 덕분에 잘됐다'는 말 들을 때 감동해요. 대단한 게 아니더라도 도움 줄 수 있는 자리에 있어 기뻐요."
그는 "지금도 대회마다 우승을 목표로 나간다. 시선을 두는 곳까지만 발전한다고 믿으니까"라고 했다. "대회가 시작되면 누구나 같은 출발점에 서는 것이 골프의 매력"이라면서도 "이제 완만하게 내려가는 법을 고민한다"고 했다. "일단 1000라운드가 목표인데 코로나 사태로 대회가 줄어 어떻게 될지…. 333번째 출전 대회 마치면 조촐한 파티라도 열고 싶어요. 언젠가 은퇴한 뒤엔 골프에 방해될까 봐 못 했던 것들 실컷 해볼 거예요. 테니스 배우고, 스키도 타고, 결혼도 해야죠."
[최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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