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히트·엠넷 합작 서바이벌…공들여 만든 200억짜리 ‘지옥도’
지난달 26일부터 방송 중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와 엠넷 합작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I-LAND(아이랜드)>에는 노골적인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미성년자인 연습생들을 지배한다. 엠넷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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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명 소년들의 아이돌 되기 ‘투쟁’
평가 결과 따라 상반된 환경 제공
치열한 경쟁 속 자기 착취 당연시
운명 가르는 경연 탈락자 선정 땐
연습생들이 서로 지목하는 구조
정신적 폭력의 책임까지 떠맡겨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 위로 3년간 무려 200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으니 그럴싸한 ‘세계관’이 세워졌다. “아이돌의 꿈을 가진 이들이 성장하여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오랜 기간 동안 설계된 가장 완벽하고 진화된 생존 경쟁의 공간”이라 소개되는 3000평 규모의 건물 ‘아이랜드’가 그 배경이다. 여기 모인 소년 23명은 ‘남의 낙오가 곧 나의 생존’이 되는 룰 속에서 연습생에서 아이돌로 ‘태어나기’ 위해 투쟁을 벌인다. 노력과 협동뿐 아니라 견제와 질시, 아부와 배신 등 생존을 위한 갖은 무기가 동원된다. 생존 앞에 흔들리는 인간성을 탐구하고 싶다면 꽤 매혹적인 이야기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 이것은 <헝거게임>이나 <메이즈러너> 같은 픽션이 아니다. 여기엔 사람이, 누구보다 보호받아 마땅한 미성년의 아이들이 있다.
지난달 26일부터 방송 중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와 엠넷 합작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I-LAND(아이랜드)> 이야기다. <아이랜드>는 마치 공들여 만든 ‘지옥’처럼 보인다. 이곳의 세계관은 데뷔조 12명에게만 제공되는 의식주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숙소 ‘아이랜드’와 모든 면에서 낙후된 낙오 공간 ‘그라운드’의 선명한 대비로 시각화된다. 아이랜드에서 호화로운 음식과 공간, 옷과 신발에 감탄하던 연습생은 그라운드에 떨어져선 검은 옷을 맞춰 입고 좁은 연습실에서 살을 부대껴야 하는 치욕에 직면한다. 아이랜드 연습생의 무대가 나쁜 평가를 받을수록, 그라운드 연습생의 신분 상승 기회가 커진다. 노골적인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평균 연령 17.2세의, 대부분이 미성년자인 연습생들의 삶을 파고든다. 이곳에 ‘지옥’ 아닌 이름을 붙이기 힘들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강도 높은 경쟁체제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신적·신체적 폭력의 책임을 연습생들에게 지운다는 것이다. 아이랜드냐, 그라운드냐 운명을 가르는 경연이 매주 반복되는 동안 이들을 통제하는 것은 놀랍게도 ‘시스템’이라 일컬어지는 건조한 성우의 목소리뿐이다. 시스템은 매 순간 연습생들에게 방출자를 스스로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어린 연습생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방금까지 한 팀으로 호흡 맞췄던 동료를 그라운드로 떠밀어야 한다. 프로듀서를 자임하는 방시혁 빅히트 의장, 가수 비와 지코 등은 그저 세트장을 비추는 37개의 모니터를 통해 이런 모습을 관조한다. 이것이 마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듯 ‘스토리텔러’ 남궁민이 말한다. “이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죠.”
“예의가 없는 거야.” “위험해서 안무를 못한다 치자. 그걸 이해해 줄 시청자는 없다니까?” 지난 10일 방송된 3회, 프로듀서 비가 연습생들에게 호통을 친다. 통솔자나 지도자 없이 영상 하나에 의존해 안무를 익히던 그라운드 연습생들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합동 안무 연습을 뒤로 미뤄놨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5월 말, 이동식 무대에서 촬영하던 아이랜드 연습생 한 명이 낙상해 부상으로 하차했다. 당초 24명으로 발표됐던 출연진이 23명이 된 이유다. 그럼에도 안전 불감증은 여전했다. 첫 번째 경연에서 이동식 무대가 그대로 사용됐고, 프로듀서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연습생에게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 연습생들은 안전과 건강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우리 이제 잠을 줄여야 해요.” 아이들은 자기 착취에 익숙해진다.
<아이랜드>는 흥미로운 세계관, 완벽한 안무, 지치지 않는 열정 등 K팝의 성공을 이끈 요소들을 구현하기 바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연습생들은 세계관 속 캐릭터나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며, 인권이 짓밟혀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프로그램은 아이랜드가 연습생의 ‘성장’을 돕는다는 허울만 내세우다가, 정작 이들이 존중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빅히트의 참여가 보여주듯, <아이랜드> 경쟁체제는 K팝 아이돌의 실제 ‘생산 공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돌과 연습생들이 지속적으로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이 같은 비인간적 ‘생산 공정’에서 기인한다. 시청자 투표에 외부 참관인 제도를 도입했다고 해서 <프로듀서 101> 시리즈가 반복한 과오가 바로잡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돌·연습생 인권 보호에 대한 고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굳이 예산 200억원을 들여 이 기이한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아이랜드>의 태도를 보건대, K팝의 변화는 아직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다시 <데미안>의 문장을 본다. 깨져야 할 세계는 따로 있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할 이는 따로 있다. K팝의 환골탈태가 시급한 때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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