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죄책감 없이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만 해"
무기징역 선고에 고유정, 고개 숙인 채 반응 없어
의붓아들 살해, 합리적 의심 지울만큼 입증 안돼
전 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고유정이 20일 오후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제주지법에 도착해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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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고유정(37)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는 유죄로 인정됐지만, 의붓아들을 살해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단이 내려졌다.
제주지법 형사 2부(재판장 정봉기)는 20일 살인 및 사체손괴·은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고유정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천륜인 아들과 친아버지인 피해자의 관계를 단절하는 살인이라는 범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질이 불량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혼한 뒤 2년 만에 아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달려간 피해자는 자신을 아버지가 아닌 삼촌으로 알고 있던 아들과 불과 한나절의 시간을 보내고 살해당했다"며 "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참혹한 결과를 만들었고, 한때 가족이었던 고유정의 손에 피해자를 잃은 유족은 평생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재판부는 "(유족은) 피해자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슬픔에 고유정을 엄벌에 처해달라 호소하고 있다"며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 못하는 고유정의 어린 아들이 비극적 범행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등 향후 성장과정에서 마주칠 충격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유정은 피해자 유족의 고통을 외면하며 성폭행 하려하자 저항하려다 살해했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며 "인간적 연민이나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고,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고유정은 작년 3월 의붓아들을 살해하고 두 달 뒤 전 남편마저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아왔다. 재판부는 남편 살해 혐의를 유죄로, 의붓아들 살해 혐의를 무죄로 결론냈다. 전 남편 살해 현장인 펜션 내부의 혈흔 등 각종 증거를 종합할 때 "우발적으로 칼로 찔렀다"는 고유정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고유정이 펜션 투숙 직전 구입한 휴대용 가스버너와 흉기, 락스 등의 물품도 피해자를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할 의도로 사들인 것으로 봤다. 고유정이 호신용 전기충격기, 테이저건, 니코틴, 수갑 등을 검색한 것에 대해서도 "피해자를 제압하고 사망시키기 위한 수단을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검색한 것"이라며 "범행과 무관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픽=이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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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재판부는 의붓아들을 살해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살인죄 등의 무거운 범죄도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로 인정할 수 있지만, 이 경우 간접증거들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하고 피고인이 고의적으로 범행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며 "고의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닌 이유를 확실히 배제할 수 없다면 무죄로 추정하는 게 헌법상 원칙이다. 이 원칙을 번복하기 위해서는 직접증거가 있어야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례"라고 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을 봤을 때 고유정이 현 남편 홍모(38)씨에게 수면제 성분의 차를 마시게 해 잠에 빠져들게 했다는 것이 증명돼야 한다"고 전제했다. 홍씨가 저항할 수 없는 사이 고씨가 의붓아들을 살해했다는 게 공소사실이어서다.
재판부는 "고유정이 (수면제 성분이 포함된) 전문의약품을 갈아서 차에 넣어 홍씨가 마시도록 하고 의붓아들을 살해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면서도 "공소사실이 증명되려면 홍씨가 깨지 않도록 고유정이 약을 탄 사실이 엄격한 증거에 의해 증명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유정이 바로 옆에 앉은 홍씨 모르게 대담하게 약을 가루로 만들어 차에 넣었을 거라 단정하기 어렵고, 홍씨가 불면증 때문에 이전에 처방받은 약을 스스로 복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며 "고유정이 해당 의약품의 성분에 대해 검색하거나 효능을 알아보지도 않은 채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전 남편 살해와 관련해서는 범행 내용을 상세히 검색한 행태와도 배치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유정은 홍씨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홍씨와의 사이에 아이를 갖고, 의붓아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며 "홍씨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친아들을 살해했다는 ‘범행 동기’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제주 전 남편 살해 사건' 피의자 고유정이 12일 오전 제주 동부경찰서에서 제주지검으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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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연녹색 수의를 입은 고유정은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재판 말미에 재판부가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현 남편 홍씨 측 변호인은 "상식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이번 판결이) 부당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 검찰이 즉각 항소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동 수사가 제대로 돼 경찰이 고유정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수사를 했다면 결코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쉽다"며 "부실 수사에 관해 경찰과 국가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지난달 11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고유정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피고인 고유정은 아들 앞에서 아빠(전 남편)를, 아빠(현 남편)앞에서 아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반인륜적 범행을 저질렀다. 두사건 모두 극단적 인명경시태도에서 기인한 살인"이라며 "하지만 고유정은 전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구형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고유정은 지난해 5월 25일 오후 8시 10분부터 9시 50분 사이 제주시 조천읍의 한 펜션에서 전남편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바다와 쓰레기장 등에 버린 혐의다.
또 지난해 3월 2일 오전 4~6시쯤 충북 자택에서 잠을 자던 의붓아들(5)의 등 뒤로 올라타 손으로 피해자의 얼굴이 침대에 묻히도록 한 뒤 뒤통수 부위를 10분 가량 강하게 눌러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제주=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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