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2 (목)

이슈 [연재] 중앙일보 '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힘이 되는 가족, 짐이 되는 가족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긴 슬럼프 끝에 지난해 11월 유러피언 투어에서 우승하고 캐디와 기쁨을 나누고 있는 대니 윌렛. [AP]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뚱뚱하고 못돼 먹었다. 지하실에 득실거리는 벌레 같은 존재이며 이들을 잠재워야 한다.”

2016년 라이더컵을 이틀 앞두고 영국의 작은 골프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라이더컵은 양대륙의 자존심을 건, 한일전 같은 치열한 경기다. 이런 과격한 글이 더러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문제였다. 라이더컵 유럽 선수인 대니 윌렛(잉글랜드)의 형인 피트 윌렛이 썼다. 그는 드라마 작가이자 아마추어 골프 칼럼니스트였는데, 라이더컵에서 미국을 이겨야 한다는 논조로 매우 시니컬한 글을 썼다.

대니 윌렛은 2016년 마스터스 우승자다. 윌렛은 공식 인터뷰에서 형의 칼럼에 대한 질문을 12번이나 받았다. 누차 사죄를 했고, “나는 형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윌렛은 대회 전날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공을 칠 수 없었다.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비웃음과 항의 때문이었다.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관중이 오지 않는 5번 홀에 공 한 바구니를 가져가서 연습했다. 고독한 훈련 도중 캡틴 대런 클락이 찾아와 "내일 오전 경기에 뛰지 말라"고 통보했다. 팀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다.

유럽팀의 에이스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던 윌렛은 딱 3번만 경기에 나갔고, 모두 졌다. 그가 경기하는 동안 윌렛을 조롱하는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았다.

동료들은 처음엔 윌렛에게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했으나 영향이 점점 커지자 사건을 윌렛의 형의 이름을 따 ‘피트게이트’라고 불렀다. 유럽은 미국에 졌다. 얼마나 당했는지, 윌렛은 대회가 끝난 후 “(미국인은 지하실 벌레 같다고 한) 형의 얘기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일주일 고생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후 지독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윌렛은 이듬해 PGA 투어에서 가장 잘한 성적이 39등, 두 번째 잘한 기록은 69등이었다. 2018년 미국에서 벌어진 PGA 투어 대회에서 윌렛은 모두 컷탈락하거나 기권했다.

세계랭킹 9위였던 윌렛은 2018년 중반 랭킹이 462위까지 떨어졌다. 윌렛은 지난해 11월 유러피언투어에서 우승하면서 슬럼프에서 탈출했다. 라이더컵 사고 후 2년 2개월이 지나서였다.

중앙일보

2016년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대니 윌렛. 라이더컵 '피트 게이트' 이후 세계랭킹이 462위까지 추락했다. [AP]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자 골프 세계랭킹 2위이자 여자 골프 최고 인기 스타인 박성현의 부친이 사기 혐의로 피소됐다. ‘자녀를 서울의 한 대학에 진학시켜주겠다’, ‘청소년 국가대표를 시켜주겠다’ 등의 말로 축구 선수 학부모에게 돈을 받아 챙긴 혐의라고 한다.

박성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관계자들에 의하면 부모가 이혼해 따로 살고 있고, 이전에 아버지가 진 빚을 갚아줬으며, 생활비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성현이 빨리 극복하기를 바란다.

그러고 보면 한국 골프 선수 가족, 특히 아버지가 자주 사고를 냈다. 성폭행, 매니저 폭행, 택시 기사 폭행, 세금 체납 및 조사관 협박 등 잊을 만하면 터졌다. 사건이 나면 아무런 죄가 없는 선수들의 이름도 거론됐다. 선수들은 대부분 슬럼프에 빠졌다.

정신력이 강한 선수는 금방 극복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윌렛 이상으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댓글이나 연관 검색어로 아버지의 추문이 다시 거론될까 봐 우승 문턱에서 일부러, 혹은 무의식적으로 물러서는 선수도 있고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 비인기 투어로 옮기는 선수도 있다. 골프는 주위 환경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멘탈 스포츠다.

윌렛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는 “솔직히 우리 형이 아니었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을 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선수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피해는 고스란히 선수가 본다.

대한민국 헌법도 죄인의 잘못을 가족과 친지에게도 묻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법전에 쓰여 있는 대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댓글 등장 이후 여론 연좌제는 더욱 심해졌다. 가족이라면 힘이 되지 못하더라도 짐은 되지 말아야 한다.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