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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브렉시트'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 표류, 영국 의회민주주의 위기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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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위한 반대' 현대의회 역기능의 상징… '침팬지 의회' 조롱도

유럽 각국도 당파주의·비타협성 번져… 극우 포퓰리즘 정당 득세

지난 4일 영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조세 법안을 심의하던 도중 천장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바닥에 흥건한 빗물에 놀란 의원들이 급히 정회하고 자리를 피했다. 어이없는 빗물 소동에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둘러싸고 결론 없이 공전을 거듭하는 영국 의회 민주주의의 붕괴를 상징한다는 자조가 쏟아져 나왔다. 노동당의 저스틴 매더스 의원은 "의회에 앉아 천장에서 비 오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의회가 붕괴한 것 같다"고 트위터에 적었고, 보수당의 줄리아 로페즈 의원은 "성서에 나오는 대홍수가 (무능한) 우리를 쓸어가려고 밀려왔나"라고 자조했다.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를 둘러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장기간 표류하면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출범한 지 754년을 맞은 영국 하원은 전 세계로 의회 민주주의를 확산시킨 발원지였다. 1265년 왕정 개혁을 주도한 귀족 시몽 드 몽포르가 귀족·성직자뿐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평민들의 대표도 의회에 참여시킨 것이 영국 의회의 시작점이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의회 민주주의 발명국'으로서 자부심이 넘쳤지만 최근에는 의회의 무기력에 환멸과 냉소를 보내고 있다. 서른두 살 소방관 토미 터너는 "의회가 돌아가는 걸 본 영국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조선일보

‘침팬지 의회’ - 영국 브리스틀 박물관이 브렉시트 예정일이었던 3월 29일 전시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위임된 의회’라는 2009년 작품. 영국 하원에 의원들 대신 침팬지 100마리가 앉아 있다. 브리스틀 박물관은 브렉시트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의회의 무능을 풍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전시했다. /뱅크시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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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를 향한 분노와 조롱은 심각한 수위로 치닫고 있다. 영국 리서치 기관인 국가사회연구센터(NatCen)가 지난달 내놓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이 브렉시트를 잘못 처리하고 있다는 응답이 2017년 2월에는 41%였지만 올해 2월에는 81%로 나타났다. 당초 브렉시트 예정일이었던 지난 3월 29일 영국 브리스틀 미술관은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위임된 의회'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이 그림에는 영국 하원에 의원들이 아니라 침팬지 100마리가 앉아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무능한 의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을 대표하던 민주주의가 이제는 영국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했다.

현재 영국 의회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점철되어 가는 현대 의회의 역기능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뉴욕타임스는 "영국인들은 어떤 브렉시트 대안을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을 못 하지만, 무엇에 반대하느냐고 묻는다면 메이 총리의 합의안 또는 노딜 브렉시트 등 명확한 답을 내놓는다"며 꼬집었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 각국의 의회에서 당파주의와 비타협성이 심각한 수위로 치달으면서 정치권 판도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 주류 정당 분열, 중도 정당 몰락,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의 득세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독일·스페인·스웨덴·네덜란드에서 중도 정당이 몰락하고 허약한 연립정부가 포퓰리즘 성향인 야권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폴란드는 아예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집권 여당이다. 정치학자인 릴리아나 메이슨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는 "반대를 위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부정적 당파주의'가 득세하면서 반대편에 대한 편견이 커지고 유권자들은 쉽게 분노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영국 국회의사당이 있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앞에서 한 여성이 지난 3일(현지 시각) ‘민주주의가 배신당했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장기간 표류하자 ‘영국 의회 민주주의가 붕괴한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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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회의 장점인 의회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이 빠른 의사 결정으로 일사불란하게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는 것과 비교되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서구 사회에서 의회가 대중이 원하는 공동 이익을 추구한다는 믿음이 깨졌다"며 "의회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혼란이 고조되고 있어 민주주의는 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 의회는 지금까지 테리사 메이 총리가 EU와 마련한 브렉시트 합의안을 세 차례 부결했다. 이후 의회에서 직접 마련한 8가지 대안을 놓고 의향 투표(과반수 찬성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실시하는 끝장 투표)를 벌였지만 그마저 모두 부결됐다. 이어 지난 1일 또다시 네 방안을 놓고 2차 의향 투표를 실시했지만 또 모두 부결됐다.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의회가 계속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자 메이 총리는 지난 5일, 4월 12일로 미뤄놓은 브렉시트를 다시 "6월 30일까지 더 연기해달라"고 EU에 공식 요청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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