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8 (수)

이슈 [연재] 스포츠서울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

[고진현의 창(窓)과 창(槍)]끊어지지 않는 체육 악습의 고리,그 원인과 처방은? 책임지고 물러나는 용기와 연대책임이 절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포츠서울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한국 체육에서 폭력과 성폭력이라는 악습의 고리는 왜 그토록 질긴 것일까. 사고가 터질 때마다 나오는 체육계의 대응방식에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체육은 파괴력이 크지만 휘발성도 크다는 허점을 파고든 고도의 노림수에 대중들이 번번이 속아 넘어가곤 한다. 이게 바로 체육계에 만연된 구조적 폭력이 뿌리뽑히지 않고 존속하는 이유일 게다. 사고가 터지면 반복되는 관계기관의 대책은 이제는 정말로 지겹다. 실천의지가 빠진 번드레한 대책은 책임져야할 사람들의 혹세무민의 레토릭(rhetoric)이요,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꼼수에 불과하다.

민도가 높은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사건과 사고가 터지지만 우리와 극명하게 다른 점이 하나 존재한다. 대책을 내놓기 전에 그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꼭 있다는 점이다.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나사르 사태’만 봐도 그렇다. 스콧 블랙문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사무총장을 비롯해 애런 애슐리 USOC 경기력향상 책임자 등 USOC 고위급 인사들이 줄줄이 사퇴한 것은 물론 케리 페리 미국체조협회장과 후임 베리 보노 회장까지 모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어디 그 뿐인가. 나사르를 주치의로 고용한 루 애나 사이먼 미시간주립대 총장까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용기, ‘꼬리 자르기’에 익숙한 한국 체육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번 사태에서도 책임있는 자들의 용기있는 선택은 보이지 않는다. 하도 들어 듣기에도 민망한 판에 박힌 대책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고 우리 국민들의 ‘냄비근성’을 철석같이 믿는 듯 이번 사태도 슬쩍 넘어가려는 관성적 태도가 감지되곤 한다. 사탕발림같은 사태 진정용 대책으로 또 다시 ‘꼬리 자르기’에 나선다면 악습의 고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누구 하나 책임지고 물러나는 용기가 없다면 뿌리 깊은 악습의 고리는 또다시 건재할 가능성이 높다.

폭력과 성폭력에 관한 체육계의 울림없는 메아리는 한국 스포츠의 구조적 특수성에서 비롯됐다. 체육의 구조적 폭력은 압축성장시대에 스포츠 국가주의(state amateurism)를 체육정책으로 택하면서 싹이 텄다. 체육을 국가 위상 제고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엘리트 체육에 입문한 모든 선수들은 체육에 올인하는 구조에 몸을 내던지게 된다. 경기력을 위해 학습권 등 다른 모든 걸 포기한 엘리트 선수들은 벼랑 끝 험지(險地)에 내몰려 결국에는 지도자에 절대 복종하는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선수들과의 관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 지도자는 폭력과 성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곤 했다. 운동을 포기하면 선택지가 사실상 별로 없는 선수들은 가해 지도자의 비위를 덮어주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내몰리거나 더 나아가 피해 선수가 가해 지도자를 두둔하는 모순의 극치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운동을 포기하면 인생의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황을 만든 체육의 구조적 모순이 폭력과 성폭력의 희생자를 양산한 배경이라는 사실은 한국 체육 생태계의 바람직한 지향점을 제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뿌리 깊은 폭력과 성폭력 문제를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운동에만 올인하는 학원 스포츠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게 우선이다. 학생 선수가 학업을 팽개치고 운동에만 올인하는 건 구만리 인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학생 선수들의 인생을 담보로 몸집을 불린 지도자의 위세와 권력은 제어하기 힘든 폭주기관차에 비견될 정도라 학원 스포츠 생태계의 획기적인 변화는 체육 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처벌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체육에 만연된 구조적 폭력을 개인과 개인의 차원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짙다. 이는 악습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결정적 이유다.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며 그 방식은 연대책임을 묻는 쪽으로 바꾸는 게 마땅하다. 불의에는 눈을 감고 불이익은 참지 못하는 게 한국 체육계의 풍토라고 봤을 때 사건과 사고가 터지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조직과 관계 기관에까지도 책임을 묻는 처벌방식이 절실하다. ‘나사르 사태’의 경우를 살펴보자.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미국체조협회와 미시간주립대는 막대한 재정적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사르를 고용했던 미시간주립대는 피해자 개인 보상금 등으로 5억달러(약 5616억원)를 지급했고 체조협회는 1억5000만달러(약 1685억원)의 합의금을 내고 보상금을 감당하지 못한 채 파산을 신청했다. 앞으로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 방지를 위해서 해당 단체에 연대책임을 묻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옳다. 대한체육회 산하 회원종목단체 지위 유지에도 폭력과 성폭력 문제를 적극 개입시키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연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한빙상경기연맹을 이 기회에 회원종목 단체에서 퇴출시키는 것도 고려해봄 직한 방안이다.

원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대변되는 무관용 원칙 등, 녹음기 틀듯 되풀이되는 식상한 대책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악습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열쇠는 개혁에 대한 단호한 의지와 책임의식에 있다. 앞으로 만들어질 ‘조재범 법’에는 책임져야 할 사람이 물러나고 이와 함께 관리·감독 소홀을 이유로 연대책임을 묻는 조치가 반드시 포함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심석희의 눈물어린 용기가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기사제보 news@sportsseoul.com]
Copyright ⓒ 스포츠서울&sportsseoul.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