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박항서가 '베트남의 영웅'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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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MHN 황산성 기자] 베트남도 대한민국이 한 마음이 되어 외치고 있는 '박항서 매직!',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어떤 인물일까.
박항서 감독은 2018 스즈키컵이 절정에 다른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축구 감독이지만 그가 선수로 생활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박항서는 1959년 1월 4일,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출생했다. 유소년기를 거쳐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던 박항서는 19세에 아시아 청소년축구대회 대표로 선발되어 2진과 1진을 오가며 활동했다. 이어 22세에는 실업 축구단인 제일은행 축구단에 데뷔하여 경력을 싿기 시작했다.
1981년,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입대 해 군복무를 마친 뒤에는 럭키 금성에 입단하여 미드필더로 선수 활동을 재개했다. 또한 1985년에는 K리그에서 우승하며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박항서가 소속된 럭키금성 황소는 1986년에는 K리그에 준우승 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박항서는 1988년 시즌이 끝난 뒤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가 걸어온 축구 인생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박항서는 과거 필드에서 뛰는 동안에는 그가 이루고 내고 있는 감독 업적에 비해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는 얼핏 들으면 더 밝게 빛나는 별의 그림자에 가려진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결말처럼 보인다. 스포츠의 세계는 냉혈하고, 대중들의 기억에 보다 선명히 남는 것은 '독보적인 선수'인 경우가 많다.
물론 축구선수 박항서 역시 국가대표로 뽑히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능은 상대적인 것이고 박항서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새로운 선수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박항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항서가 축구에 대한 열정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비록 7년이라는, 다소 짧은 기간동안 축구 선수로 활동하긴 했지만 그는 그저 다른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박항서가 은퇴를 선언한 그날, '베트남의 히딩크'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②에 계속
황산성 기자(press@mhn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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