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스텝 바이 스텝
척추 다치고 들어온 재활원,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는 거야
재활원에 온 벤(오른쪽)에게 일상은 낯설고 힘들다. 그에게 물리치료사(왼쪽)가 묻는다. “그거 알아요? 오늘 처음 일어났어요.” /에스와이코마드 |
인생은 찰나에도 비틀린다. 잘나가는 농구 선수였던 청년 벤(파블로 폴리)이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 척추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는다. 긴 수술 끝에 눈뜨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병원의 새하얀 천장뿐. 침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은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저 멀리서 간호사 목소리가 들린다. “금방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벤은 중얼거린다. ‘제기랄….’
이런 얘기도 영화가 될 수 있다. 11일 개봉하는 ‘스텝 바이 스텝’(감독 그랜드 콥스 마라드·메흐디 이디르)은 지금껏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곳은 다름 아닌 재활원.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배변도 혼자 해낼 수 없는 전신마비 환자나 상·하반신 마비 환자가 모여 지내는 곳이다. 지금껏 대다수 ‘메디컬 영화’는 병원 응급실이나 수술실 문을 열어젖히는 것을 선호해왔다. 선혈이 낭자하고 비명이 들리는 곳.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이 엉망진창의 상황을 수습하는 것만 찍어도 극적 긴장감이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텝 바이 스텝’은 정반대 길을 택한다. 수술이 끝나고도 삶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일상은 느슨하면서도 버겁다. 주인공들은 엄지손가락을 검지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거나 발가락 다섯 개를 벌리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영화는 그러나 고통스럽지도 지난하지도 않다. 드럼을 가볍게 두들기듯, 캐스터네츠를 움직이듯, 영화는 벤을 비롯한 재활원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깨알 같은 즐거움을 캐내는 장면들을 엮어낸다. 같은 병실 친구끼리 침대에 누워 간호사가 대소변을 받아가길 기다리면서 “전신마비든 하반신마비든 똥 쌀 땐 똑같네”라고 농담할 때, “걔랑 했냐?”란 친구의 한심한 질문에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 뭘 바라는 거지?”라고 주인공이 대꾸할 때, 관객은 그들이 모인 공간이 재활원임을 잊고 배꼽을 잡는다.
영화는 감독인 그랜드 콥스 마라드의 자전적 얘기이기도 하다. 농구 선수 유망주였으나 스무 살에 크게 다치고 하루아침에 전신마비를 겪게 된 마라드는 1년간 혹독하게 재활 치료를 받은 끝에 시를 역동적으로 낭송하는 이른바 ‘포에트리 슬램 아티스트(Poetry Slam Artist)’로 활동하게 됐다. 마라드의 삶이 다친 이후에도 그렇게 이어졌듯, 영화 속 주인공들도 결국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읊조린다. 한 걸음 내딛는 건 여전히 힘들고, TV 속 헬스 코치가 “이 동작은 쉽죠?”라고 외칠 땐 실소가 터지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함께 견딜 친구가 있으니까. 혼자 저절로 낫는 이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15세 관람가.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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